장서 리뷰

공무원 생리학

kdy820 2021. 10. 22. 11:03

오노레 발자크(Honore Balzac)로 태어나 오노레 '드' 발자크(Honore de Balzac)로 생을 마감한 그는 오로지 글쓰기로 자신의 모든 것을 증명했다. '올빼미 당원'을 발표한 이래 사망할 때까지 총 90여편이 넘는 소설을 집필했으며 익명으로 쓴 작품까지 합하면 그 수를 다 헤아릴 수 없다.

첫 작품 '크롬웰'의 처절한 실패 이후 익명으로 통속소설을 쏟아냈고, 이후 소설보다 저널리즘이 돈이 된다고 생각하여 문학판을 떠나기도 했다. 인쇄업, 출판업, 활자 주조업 같은 사업에도 손을 대나 실패하여 막대한 채무에 시달렸다.

발자크 필생의 역작 '인간희극'은 사실주의 문학의 정수로 '골짜기의 백합', '고리오 영감', '환멸' 등 국내에도 다수의 작품이 소개되었으나, 인간 생리를 날카롭게 꿰뚫는 르포르타주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부족하다.

'공무원 생리학'과 '기자 생리학'은 작품 연보에도 잘 나와 있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소품이지만 발자크 특유의 풍자와 통찰, 촌철살인으로 빛나는 역작이다. 오늘날 공무원과 정치인, 기자와 평론가는 많은 이가 선망하는 직업인 동시에 사회적인 악이 될 수 있다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19세기에 이미 발자크는 이를 간파한 것이다.

옮긴이 류재화는 고려대학교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스트라스부르 2대학과 파리 3대학에서 공부했다. 파리 3대학에서 파스칼 키냐르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지금은 고려대학교, 철학아카데미 등에서 프랑스 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이 책은 제1장 정의, 제2장, 입증된 공무원의 유용성, 제3장 공무원의 철학적 역사와 초월적 역사, 제4장 구분, 제5장 사무실, 제6장 가공한 몇몇 존재들에 대하여, 제7장 임시직, 제8장 기도, 제9장 사무직의 다양성, 제10장 요약, 제11장 국장, 제12장 실장, 제13장 사환, 제14장 퇴직자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시대적 배경은 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 2월 혁명 사이이다. 프랑스에서 '생리학' 시리즈가 대유행한 것은 1840~1842년 무렵이다. 이 용어는 이중적인 함의를 갖는데, 하나는 내용적인 면이고 하나는 형식적인 면이다.

인간 또는 인간 사회를 더는 관념적으로 설명할 수 없을 때, 동물이나 식물의 분류법처럼 인간 또는 인간 유형을 과학적 연구 대상으로 삼아 분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생리학'은 인간 유형을 분류하여 표와 도식을 만들고 삽화를 통해 그 인물 유형의 생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

 

1. 공무원의 정의

공무원을 최상으로 정의하면 다음과 같다. 살기 위해 봉급이 필요한 자, 자신의 자리를 떠날 자유가 없는 자, 쓸데없이 서류를 뒤적이는 것 외에 할 줄 아는게 없는 자.(12쪽)

이 악의적 비평에 따르면, 공무원은 사무용 책상에 앉아 온종일 뭔가를 끼적이는 자다. 사무용 책상은 한마디로 그가 사는 알껍데기이다. 공무원이 없으면 책상도 없다.(14쪽)

 

2. 공무원의 철학적 역사와 초월적 역사

아, 나도 안다. 지금 이 시대에 행정직만큼 선망하는 게 없다는 것을. 고등학교에는 이런 꿈을 가진 아이들이 득실하다. 부모는 자식이 푸른 양복에 안경 쓴 공무원 신사한테 매혹되면 내심 좋아한다. 근사한 붉은 리본에 반짝이는 단추. 어떤 부서든 관청에서 몇 가지 감시만 하고 퇴근하면 한 달에 1천 프랑을 받을 수 있다. 때로는 바이런 경처럼 늦게 출근해 일찍 퇴근할 수도 있다. 휴식 시간이 몇 시간이나 되니 튈르리 공원을 산책하며 연애 사업을 벌이기도 하고, 약간 교만한 자세로 여기저기 다니며 공연이나 발레를 보기도 하면서 '최고 사교계'에 들어갈 수도 있다. 프랑스 정부가 그에게 준 봉급을 사교클럽에서 소비하면 국가에 되돌려주는 셈이니 공무원으로서의 직분도 다한 셈이다. 사실상 관료는 예쁜 여자들의 구애를 듬뿍 받는다. 지성 있어 보이는 그들은 관청에 종일 박혀 있지도 않는다.(36~37쪽)

 

3. 구분

지방 공무원은 행복하다. 좋은 집에 살고 정원도 있으며 사무실에서도 대개 편안하다. 생수를 마시고, 말고기 안심은 먹지 않으며, 과일과 야채도 좋은 시장에서만 산다. 빚을 지지 않고 근검절약한다. 그가 뭘 먹고 사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자기 봉급은 먹지 않는다'고들 말한다.

그는 행복하다. 존경받는다. 그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다 인사를 건넨다. 결혼도 잘한다. 이제 부인과 함께 초대되고 여기저기서 찾는 인기인이 된다. 징세관, 지사, 부지사, 지방 장관 집에서 여는 무도회에 부부 동반으로 초대받는다. 다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살핀다. 성격은, 기질은, 재산은, 지성은? 그가 없으면 다들 애석해한다. 마을 사람 모두가 그를 안다. 물론 그의 부인과 자식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둔다.(53~54쪽)

 

4. 사무실

파리에 있는 거의 모든 관공서 사무실이 흡사하다고 이 무명의 저자가 말한 바 있다. 사소한 잘못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거나 미약한 것이나마 청원하기 위해 관공서를 찾아 배회하다 보면 우선 들어가는 복도는 어둡고 사람이 나오는 출구도 조명이 별로 안 좋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극장의 무대 뒤 분장실로 들어가는 문처럼 생긴 출입문에는 눈을 닮은 타원형 유리창이 달려 있고 그 창을 통해 호프만 작품에서나 볼 법한 환상적인 장면을 보게 될 것이다. 청원자는 이제 뭐가 뭔지 도통 알 수 없는 표시를 읽어가며 따라가야 한다.

당신은 우선 해당 부서를 찾아가야 한다. 그러면 안내 사환이 있는 첫 번째 칸에 오게 된다. 이어 두 번째 칸으로 들어가면 하위직으로 보이는 사무소 직원들이 앉아 있다. 차장실은 보통 거기서 오른쪽이나 왼쪽에 있고, 그보다 더 안쪽이나 한 층 올라간 곳에는 국장실이 있다.(67~69쪽)

 

5. 가공한 몇몇 존재들에 대하여

가공한 몇몇 존재는 사서, 건축가, 선교사, 회계사, 특별비서관을 가리킨다.

1) 사서: 청사에서 일하는 사서가 무슨 소용? 책 읽을 시간이 있는 사람은 장관인가? 아니면 정원 외 하급직원인가? 사서를 위해 서가를 만든 건가? 아니면 서가를 위해 사서를 만든 건가? 대부분의 장관이 사서를 두고 있다. 우리 시대 가장 저명한 시인을 장관 사서로 임명하자, 오를레앙 가문의 젊은 공작은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책이 많습니까?" 그러자 시인은 대답한다. "예, 제가 많게 해드리죠."

일단 서가에 백여 권의 책을 채워 넣는다. 그리고 사서 아래 둘 공무원을 한 명 채용한다. 이 공무원은 책 먼지를 터는 일을 하거나, 주요 임무 가운데 하나는 매달 이 한직자의 집을 찾아가는 것이다. 가방에는 3백 프랑과 서명할 등록 카드를 넣어서 말이다. 하루로 치면 약 10프랑이다.(85~86쪽)

2) 특별 비서관: 이 청년은 정치인은 아니지만, 정치적 인간이거나 인간 정치 그 자체다. 거의 항상 젊은 사람인데, 장군에 부관이 있듯 장관에 보좌관이 있는 것이다. 그의 역할은 밀착전담이다. 그는 장관의 필라데스이다. 장관에게 아첨하고 충언한다. 아니, 충언하기 위해 아첨하고, 아첨하면서 충언하고, 충언 아래 아첨을 감추기도 한다. 새파란 젊은이는 얼굴이 누렇게 뜬 채 장관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게 몸에 배어 있다. 전혀 이해되지 않는 내용인데 소통을 해야 하니 아는 척을 하느라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당신이 하는 말에 대해서도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척 할 것이다. 그들은 '그러나', '하지만, '그런데도', '그러니까 저라면', '당신 입장이라면 저는' 같은 말을 항상 입에 달고 산다. 문장마다 이미 모순어법이 준비된 것이다.(101~102쪽)

 

6. 사무직의 다양성

발자크는 사무직을 미남, 사각턱, 수집가, 작가, 겸직자, 고리대금업자, 아첨꾼, 상인, 공붓벌레, 가난한 공무원으로 분류하고 있다.

1) 사각턱: 말처럼 아래턱이 사각형으로 넓어 좀 우둔해 보이는 이 공무원은 문서계 아니면 인사계에서 일한다. 이들은 45세 무렵이 인생의 최절정기다. 기혼자가 대부분이고 군대나 회사로 치면 특무상사쯤 된다. 그들은 파리 근교에 거주하고 정원 딸린 주택 한 채를 임대한다. 키는 보통이고 좀 뚱뚱한 편이며 느릿느릿 걷는다. 관공서 소속 공무원인 것을 자랑스러워 한다. 일을 수습하고 정리하는 것에 전념하며 정치적 무심함을 자부한다. 그가 즐겨 읽는 신문인 '주르날 데 데바'의 견해만을 채택하며 어떤 권력이든 권력을 잡은 쪽에 선다. 매사에 꿍꿍이 없이 진지하고 열정적이며 부장이 요구하는 일이 있으면 한 시간 정도는 더 근무하고 집에 가기도 한다.(127쪽)

2) 아첨꾼: 이런 공무원은 대개 무능하기 짝이 없는 시시한 자들이다. 그나마 뭔가 봉사를 해야 버틴다. 아니면 지레 겁을 먹고 있다. 사무실에서는 주로 부장이나 차장 등 상관들과 이야기 나누는 걸 좋아한다. 늘 상관을 관찰하기에 그들의 속사정을 잘 안다. 결국 그들 취향이며 변덕, 기질 등을 꿰뚫는다. 그래서 모든 종류의 봉사를 한다. 사무실에서 들리는 말이나 벌어진 일 등을 다 알려준다. 이런 그가 경멸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살아남는다. 그는 너무 많은 비밀을 알고 있기에 필수불가결한 자가 된다. 이런 어마어마한 사기 혹은 기만행위에 약간의 재능과 야망만 곁들인다면, 그는 때론 성공할 수 있다.(148~149쪽)

 

7. 퇴직자

퇴직 공무원은 지치지도 않는, 신문 열독자가 된다. 공고나 부고는 물론이고, 기사 제목부터 제호 옆 신문 경영인 이름까지 빠짐없이 읽는다. 그 때문에 신문을 읽는 데 세 시간이 족히 걸린다. 그러고 나면 좀 빈둥거리다가 저녁 식사 시간이 오기를 고통스럽게 기다린다. 이런 것도 한번 하고 나면 할 만해진다. 그래도 저녁은 그의 전문 분야다. 그는 사교계에 나가기 시작한다.

많은 퇴직 공무원이 낚시에 몰두한다. 사무실에서 하던 일과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좀 영악한 다른 자들은 주식을 하며 원금을 잃거나, 때론 기업에서 한 자리 차지하기도 한다. 퇴직 공무원 가운데 시장 또는 부시장이 되는 사람도 있다. 어쨌거나 계속해서 관료가로서의 품위는 유지하는 셈이다.

모두가 과거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해 몸부림을 친다. 우울감에 빠져들기도 한다. 계속 반복적인 일을 하다 보니 죽을 것만 같은 것이다.(191~192쪽)

 

이 책에서는 공무원의 활동과 습성을 요약하여 묘사하면서도 공무원이 어떻게 주조(鑄造)되어 나온 것인지 그 태생 원리를 완벽하게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상투적으로 인식하는 공무원 사회의 형식주의, 복지부동 또는 태만과 부패 등은 각 시대와 문화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지만 본질적으로는 동일하다는 것을 발자크는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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