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 리뷰

특별한 형제들

kdy820 2022. 1. 5. 22:35

 

저자 정종현은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0년에 교토대학 인문과학연구소에서 박사후 연수를 한 후,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HK연구교수와 인하대학교 HK교수를 거쳐 현재 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 책은 식민과 해방, 전쟁과 분단의 시대를 산 13쌍의 특별한 형제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형제들의 삶은 고귀함과 치열함, 비루함과 욕망 등 인간의 복합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결속을 표상하는 ‘형제애’를 근본적으로 다시 성찰하도록 이끌고 있다. 우리는 이들의 삶을 통해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이해할 수 있다.

 

1. 식민과 분단으로 서로를 지운 ‘평양’의 형제 : 정두현과 정광현

정두현(鄭斗鉉, 1888~?)과 정광현(鄭光鉉, 1902~1980)은 평양의 유지였던 정재명(鄭在命)의 장남과 3남으로, 열네 살 터울의 형제다.

정두현은 메이지학원 중학부를 거쳐 도쿄(東京) 제국대학 농학부(1910.4~1914.7) 유학 후에도, 도호쿠(東北) 제국대학 이학부(1927.4~1930.3), 타이완의 다이호쿠(臺北) 제국대학 의학부(1938.4~1941.12) 등 세 곳의 제국대학에서 공부했다. 정광현도 형이 다녔던 메이지학원 중학부를 졸업하고 제6고등학교를 거쳐 도쿄제국대학 법학부(1925.4~1928.3)를 졸업했다.

정두현은 1946년에 김일성종합대학 설립을 주도하고 초대 의학부장이 된다. 그는 1946년 6월 17일에 북조선노동당에 입당하여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1947년에는 유엔의 한국임시위원단 조직에 대항해 31명으로 구성된 임시헌법제정위원회에 김일성, 김두봉 등과 함께 선임되었다. 남한의 동생 정광현은 정두현의 사회적 경력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는 부담스런 존재였다. 그래서 정두현은 자필 이력서에 정광현을 올리지 않았다.

정광현은 1950년 1월부터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취임하여 1962년 정년 때까지 봉직했다. 그는 평생 저서 10권, 논문 136편을 발표했으며, 한국 친족상속법의 기초를 마련하고 헌법에 남녀평등 이념을 구현한 법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정광현에게 북한 사회의 중추가 된 형은 위협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형을 떠올리는 대신 정광현은 장인 윤치호에게 애틋한 정을 쏟았다. 그는 말년에 미국에 살면서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가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힘썼을 뿐 아니라 윤치호 전기를 집필해 애국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고자 했다.(15~31쪽)

 

2. 검찰총장과 남로당원 : 이인과 이철

이인·이철 형제의 부친 이종영(李宗榮)은 헤이그 밀사 이준 열사와 교류했으며, ‘자강회’와 ‘대한협회’의 중심인물로 활약한 구한말의 애국지사였다.

미군정에서 검찰총장을 역임하고 이승만 정부 초대 법무부장관을 지낸 제헌의회 국회의원 이인(李仁, 1896~1979)과 새로운 조선의 진로를 사회주의로 설정한 남로당원 이철(李哲, 1928~2001) 형제는 원만할 수 없는 사이였다.

이인에게 좌익 활동을 하는 이철은 눈엣가시였다. 이인은 이철이 자신의 아들딸을 “붉게 물들인다”며 “우리 집안을 망치는 놈이다”라고 노발대발했다. 신문 기자들과 만나서는 “철 같은 놈은 잡아 죽일 수밖에 없다”고 공공연히 극언하며 이철과 의절하다시피 할 정도로 감정이 나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인이 검찰총장, 법무부장관 등을 지내며 좌익 색출에 몰두하는 동안, 그의 아들딸은 삼촌인 이철에게 ‘붉게 물들어’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되었다. 이인의 집은 남한 사회에서 가장 안전한 남로당 아지트였던 것이다.

이인·이철 형제의 갈등은 “시대의 장난이요, 민족의 비극”이라고 할만하다. 이인으로 말하자면, 해방 후 공산당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점차 강경한 우익 성향을 보였지만, 그 어렵던 일제강점기를 훼절하지 않고 올곧게 살아나온 존경할만한 인물이다.

이철의 경우는 어떠한가. 경성법학전문학교 출신으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서 불문학 전공으로 학구 생활을 하던 이철은 민족의 현실을 외면하지 못하고 현실 운동에 뛰어들었다.

사상 사건을 무료 변론하고 조선어를 지키려다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던 형과, 민족을 위한 올바른 길을 사회주의에서 찾으려한 양심적인 인텔리 청년이었던 동생. 분단과 전쟁은 이념이 다른 이 형제를 화해할 수 없는 운명으로 갈라놓았다.(35~49쪽)

 

3. 공산당 부역자와 ‘애국가’ 작곡가 : 안익조와 안익태

안익조(安益祚, 1903~1950)는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安益泰, 1906~1965)의 형이다. 그는 평양 문무리에서 여관을 경영하던 안덕훈(安德勳)과 김정옥(金貞玉) 사이에서 7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안익태는 셋째 아들로, 안익조와 세 살 터울이다.

학창 시절 유명한 야구선수였던 안익조는 고치(高知)고등학교를 거쳐 1929년 3월에 도쿄제국대학 농학부 수의학과를 졸업하고, 그해 4월에 다시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 입학하여 1933년 7월에 졸업했다.

식민지 시기의 안익조는 컬럼비아레코드사 문예부장에서 만주국군 군의로, 군의에서 다시 컬럼비아극단과 조선연예기업사 대표로, 연예기업사 대표에서 후생의원 개업의로 여러 차례 생업을 바꾸었다.

안익조는 해방 후 경찰에 투신해 제5관구경찰청 총무부과장, 경상북도 군위경찰서장 등을 역임하고, 1949년 6월 헌병 소령으로 특별 임관 후 제3사단 헌병대장이 된다.

1950년 11월 7일, ‘시외 모처’에서 ‘부역자’ 23명이 총살되었다. 그날 처형된 23명 중에는 의정부 방어부대 제7사단에서 낙오한 헌병대장 안익조 중령과 그의 아내도 있었다. 당시 신문에 보도된 안익조의 범죄 내용은 “6·25 경 서울 시내에서 국군으로부터 이탈된 낙오자로서, 7월 3일경 괴뢰군 군사비밀조사위원회에 자진 출두 자수한 후 9월 27일 경에 이르는 동안 은닉하였던 국군의 무기, 기관탄총, 권총, 장총 각 1정 및 동 실탄 300발을 자진 제공하였고, 피고 집을 군사비밀조사위원회 사무실로 제공, 의정부 서울간에 있어서의 국군의 전투 상황 및 그 지역에 집결된 부대 상황을 동 위원회에 제공”한 것이었다.

안익태는 평양보통학교와 숭실중학교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사립 세이소쿠(正則)중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4월 구니다치(國立)고등음악학원에 입학해 1930년 3월에 졸업했다. 전공은 첼로였다. 그해 9월 미국으로 건너간 안익태는 신시내티음악원, 필라델피아 커티스음악원 등을 거쳐 1937년 6월 템플대학교 음악대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아일랜드로 건너가 1938년 2월 더블린 방송 교향악단 객원지휘자로 유럽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회고와 공식적인 전기에 따르면, 안익태는 미국에서 <애국가>를 작곡했으며, 조선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바치겠노라 결심하고서 아일랜드로 건너가 유럽 무대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최근 여러 연구에 의해 1940년을 전후한 유럽 활동 시기에 안익태의 숨겨진 면모가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유럽에서 그의 활동 대부분은 히틀러의 독일 제국과 일본 제국의 우호와 협력을 증진하는 음악 프로그램들이었다.

1942년 베를린 필하모니 연주홀에서 열린 안익태의 ‘만주국 건국 10주년 축하 연주회’ 지휘 영상이 2006년 3월에 공개되면서 그의 친일 행위가 알려졌다. 연주홀 정면에 걸린 대형 일장기를 배경으로 <에텐라쿠>, <만주국 축전곡>을 지휘하는 안익태의 모습이 당긴 영상을 본 많은 사람이 충격을 받았다. <애국가> 작사가로 알려진 윤치호의 친일 행적에 이어 작곡자 안익태의 친일 행적까지 드러나면서, <애국가> 교체론이 거세게 일기도 했다.

안익조의 어머니와 다른 동생들은 모두 한국전쟁 전부터 서울에서 살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통에 반역자로 처형되었기에 그의 가족들이 안익조 부부의 시신을 수습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묻힌 곳조차 모르는 안익조의 최후에 비해 안익태의 말년은 영예로웠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에스파냐 여성과 결혼해 에스파냐 국적을 얻어 그곳에 정착했지만, 이승만 정부의 초대로 귀국해 1957년 대한민국 최초의 문화훈장을 받았고, 1960년대에는 서울국제음악제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1965년 9월 세상을 뜬 안익태는 에스파냐 마요르카에 묻혔다가 1977년 7월 8일 서울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53~69쪽)

 

4. ‘서유견문’의 후예들 : 유만겸과 유익겸

유만겸(兪萬兼, 1889~1944)은 구당 유길준의 장남으로 1889년 7월 13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1909년 일본 오카야마 제6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13년 졸업한 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1917년 3월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1년 더 연구 생활을 하다가 1918년 4월 귀국하였다.

유만겸은 귀국 후 조선총독부 고등관으로 사회 경력을 시작했다. 1944년에 죽을 때까지 유만겸이 맡았던 여러 경력 중에서 충청북도지사(1940년 면직), 조선유도연합회(朝鮮儒道聯合會) 부회장과 성균관을 개편한 경학원 부제학은 눈여겨 볼만한 직책이다. 유만겸에게 조선(인)의 ‘식산흥업’에 기여하는 조선총독부 관료의 삶이 아버지의 개화 이념을 실현하는 길이었다면, 경학원 부제학이라는 직함은 가문과 아버지의 한학 전통을 계승한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유억겸(兪億兼, 1896~1947)은 유길준이 일본으로 망명한 지 8개월여가 지난 1896년 10월 23일에 태어났다. 형 유만겸과는 일곱 살 터울이다. 한문을 사숙하다 1907년 한성 사립 계산학교에 입학하여 1911년에 졸업했다. 황성기독교청년회학관 중등과에서 잠시 배우다가 1912년 교토(京都) 도시샤(同志社)중학교 보통부에 입학하여 1916년에 졸업했다. 이어서 교토 제3고등학교에서 수학하고 1919년 7월에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에 입학하여 1922년 3월에 졸업했다. 이후 1년여간 도쿄제국대학 대학원에서 법학을 연구했다.

1923년 3월 귀국한 그는 변호사 등록을 하고, 4월 중앙고등학교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중앙고등보통학교에 근무한 지 4개월 만에 연희전문학교 교수에 임용되었으며, 이후 부학장을 거쳐 학감 및 부교장 등 주요 직책을 두루 맡았다. 1938년에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사건으로 구속되면서 강제로 사직서를 제출하고 학교를 떠나 있던 시기도 있었지만, 해방 이후 다시 교장직을 맡는 등 사회 경력의 대부분을 연희전문학교(해방 후에는 ‘연희대학교’로 학교명 개칭)에서 교수와 행정가로 보낸 교육자였다.

유길준·만겸·억겸 삼부자는 서구 근대를 전범으로 삼고 조선의 문명화를 지향했다. 그중에서도 유길준·유억겸 부자의 이상적 국가 모델은 미국이었던 듯하다. 조선독립의 가능성을 일찌감치 접은 유만겸과는 달리, 유억겸은 1938년 전향 이전까지 독립된 조선을 목표로 삼은 정치·사회적 활동을 이어갔다. 유억겸은 일본의 작위를 거절한 아버지에 대한 긍지를 가슴에 품고, 아버지와 유사한 세계관과 정치적 행보를 보였던 이승만을 좇았다. 청년 이승만은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5년여간 감옥 생활을 한 투사였다. 이후 비판받만한 행적도 많지만, 한국 근대화와 독립을 지향했던 많은 이들의 구심적 역할을 했던 것 또한 역사적 사실이다.(73~91쪽)

 

5. 근대 한국의 인플루언서 : 김성수와 김연수

김성수(金性洙, 1891~1955)·김연수(金秊洙, 1896~1979) 형제는 “자기 땅만 밟고서도 전라도 전역을 다닐 수 있다”는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형제의 아버지 김기중(金祺中, 김성수의 양부)과 김경중(金暻中)은 구한말 전라북도 고창 지역의 유력 지주였다. 조선 왕조시대의 대유학자였던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후손이었던 이들은 구한말에 토지와 미곡 판매로 재산을 축적했다. 김성수·김연수 형제는 김경중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후사를 두지 못한 큰아버지 김기중이 김성수를 양자로 들이면서 둘은 형제이면서 사촌지간이 되었다.

1914년 도쿄 와세다(早稻田)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한 김성수는 1915년 중앙학교를 인수하여 학교장이 되었다. 그는 1919년 주식회사 경성방직 설립과 1920년 <동아일보> 창간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32년에는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고려대학교로 성장시켰다. 해방 이후에는 한국민주당(한민당) 창당에 참여하고 수석총무가 되었으며, 1951년 6월부터 약 1년간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지냈다.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김연수는 식민지 시기 명실공히 조선을 대표하는 기업가였다. 그는 경성방직, 남만방적, 삼양사 등으로 사업체를 늘려가며 한국 최초의 거대기업집단, 곧 ‘재벌’을 일구었다. 이 ‘재벌’이라는 용어는 1932년 급성장하는 고창 김씨가의 사업체에 기자들이 붙인 이름이다. 김연수의 ‘경방’은 삼성과 현대, SK, 한화 등의 창업자들이 사업을 막 일구기 시작할 때 선망의 대상이었던 한국형 재벌의 기원이었다.

김성수·김연수 형제의 남다른 점은 충실한 인품을 갖추었다기보다는 시세의 변화를 읽고 산업과 언론, 교육에 과감하게 투자하는 안목과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편이 합당하다. 가문의 모든 토지를 담보로 잡혀 망할지도 모르는 경성방직과 동아일보사의 대주주가 되는 결단은 아무나 내리기 어려운 것이다. 우선 그럴만한 재산이 있어야 하고, 기업과 언론이 토지보다도 가문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가치 있는 기관이라는 확신과 성공에 대한 자신이 있을 때 실행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감각과 안목은 오랜 일본 유학 생활에서 길러진 것이었다.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와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를 다니면서 형제는 전통적인 양반 지주의 방식으로는 새로운 세계에서 생존할 수 없다고 깨달았다. 그들은 일본 자본주의의 발전을 직접 목격하고 지주가인 자기 집안과 조선의 미래가 근대화 및 공업화에 있다고 확신했다. 영민한 그들은 집안의 이익과 민족의 이익을 합치시켰으며, 결과적으로는 제국의 이익과도 조화를 이루었다.

일제가 패망하고 한국이 독립한 후에도 김씨 형제 후손들의 자산은 줄지 않았다. 조선 왕조 때부터 현재까지 이 가문은 통치권력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민족기업, 민족언론, 민족교육을 표방한 가문의 사업은 번창했고, 후손들은 여전히 번성하고 있다.(95~112쪽)

 

6. 어느 식민지 조선귀족 형제의 삶 : 민태곤과 민태윤

식민지 시기를 통틀어 조선귀족은 한일강제병합 당시 작위를 받은 76명, 여기에 1924년 추가로 작위를 받은 이완용의 아들 이항구, 작위를 계승한 81명의 습작자를 더해 총 158명이었다.

조선귀족 158명 중 해방 이후 유일하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사람이 있다. 남작 민태곤(閔泰崑, 1917~1944)이다.

민태곤은 아버지의 이른 죽음으로 만 17세에 남작 작위를 습작했다. 대전중학교를 거쳐 1939년 일본 도호쿠제국대학 문학부에 진학하여 서양사를 전공했다. 그는 1940년 5월 무렵부터 학생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조선의 독립과 신사회 건설을 모색했다. 일본 경찰은 그가 가담한 항일 비밀결사의 혐의를 ‘민족공산주의운동’이라고 규정했다.

민태곤은 오창근, 이건호, 김태철 등과 더불어 1941년 12월 9일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1년 5개월여 동안 경찰과 검찰의 혹독한 취조와 수형 생활로 그의 폐는 망가졌다. 석방된 민태곤은 동지들에 대한 미안함과 자괴감, 그리고 폐결핵으로 고통받다 1944년 11월 22일 죽음을 맞이했다. 이때 그의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민태곤은 독립운동 공적으로 2009년에 대한민국 애족장을 받았다. 뒤늦게나마 서훈이 이루어진 데에는 그의 동생 민태윤(閔泰崙)의 각고의 노력이 있었다.

민태곤과 일곱 살 터울인 민태윤은 그 유명한 ‘갑자생(1924년생)’이다. “묻지 마라 갑자생”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1924년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남성들은 모진 풍파를 겪었다. 민태윤도 갑자생들의 신산한 삶의 행적을 공유했다.

1944년 3월 휘문고보를 졸업한 민태윤은 1944년 12월 ‘아카가미(赤紙)’라 불린 징집 영장을 받는다. 형편이 넉넉지 못한 데다 형의 항일비밀결사 경력으로 인해 당국의 따가운 눈총을 받던 중이라 민태윤은 징병을 회피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는 1945년 1월 16일 입대 후 허난성(河南省) 신샹시(新鄕市)의 중국 북지파견군 시미즈부대(沈部隊)에서 7개월여를 주둔하며 미군의 B29 공습을 일상으로 겪다가 7월경 용산으로 귀환했다. 다시 1945년 8월 초순에 흥남비료공장 인근에 배치되어 참호를 파다 해방을 맞아 8월 19일 화물차를 타고 서울로 귀환했다. 살아 돌아온 그는 경성경제전문학교에 입학했지만 학교가 서울대학교 상대로 통합되는 ‘국대안(國大案)’ 파동에 휘말리는 바람에 졸업하지 못하고, 결혼과 함께 국립도서관에 취직한다. 얼마 뒤에 집안 친척이 실장으로 있는 신탁은행(뒷날 한일은행) 조사실로 직장을 옮겼다가 한국전쟁을 겪게 된다. 피난하지 못한 민태윤은 길거리 등에서 여러 차례 인민의용군 징집을 당하지만 기를 쓰고 도망쳤다. 서울 수복 후에는 국민방위군에 징집될 위기에 처하자 교통부 철도국원이 되었다.

철도국은 국민방위군으로 끌려가서 죽기 싫었던 그가 선택한 직장이었다. 이후 그는 교통부 본부 항공과로 옮겨가 근무하다 조중훈이 인수하여 민영화된 대한항공에 “교통부에서 간 낙하산 인사” 기획팀에 근무하다가 1979년 퇴임했다. 세 나라 군대에 휘둘린 갑자생 ‘남작’ 민태윤은 전쟁터의 위험을 피하고 아주 운이 좋게 살아남아 국민/시민의 삶을 살 수 있었다.(115~129쪽)

 

7. 국내 사회주의 운동의 개척자 형제 : 김사국과 김사민

김사국(金思國, 1892~1926)은 1892년 11월 9일 충청남도 연산(連山)에서 소지주였던 김경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경수는 젊은 아내 안국당과 어린 사국·사민 형제를 남겨두고 요절했다.

김사국은 보성학교에서 배우고 17세 때인 1908년 일본으로 건너가 피혁회사에 다니며 고학했다. 1909년에는 도쿄 한인유학생들의 연합단체인 대한흥학회에 가입해 <대한흥학보> 출판부원으로 활동했다. 귀국하여 한성중학에서 수학하고 함경도 덕원소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1918년 무렵 만주로 건너가 관동도독부 육영학교에서 고등교육을 이수했다.

1919년 2월 귀국해서부터 죽을 때까지 김사국은 당대 조선의 민족·사회운동의 일선에서 활동했다. 1919년 4월 김사국은 13도 대표자들로 조직된 ‘국민대회’를 개최해 임시정부 선포를 주도함으로써 한성정부 수립의 계기를 마련했다. 이 ‘국민대회 사건’으로 그는 1년 6개월 형을 살았다.

이때까지 김사국은 민족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가진 ‘대동단’ 계열의 민족주의자였다. 출옥 후 김사국은 민족해방을 위한 새로운 이념으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는 민족과 민중의 해방을 위해 국내 중심의 사회주의 대중 활동을 지향했다. 청년운동에선 서울 청년회, 노동운동에서 조선노동대회를 중심으로 이를 실현하고자 했다. 특히 국내에 사회주의운동을 전파하는 데에는 서울청년회의 역할이 컸다. 서울청년회를 중심으로 한 일군의 사회주의자를 ‘서울파’라고 한다.

김사국의 삶은 합법적 활동 영역과 공산주의 전위당이라는 비합법의 영역에 걸쳐 있었다. 1923년 김사국을 중심으로 서울청년회 내부에 공산주의 전위당인 ‘고려공산동맹’이 결성되었다. 1923년 봄 고려공산동맹 책임비서 김사국은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코민테른과의 상설 연락기관을 설치하고 조선공산당의 승인을 받는 임무가 그에게 부여되었다. 김사국은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끝내 성과를 얻지 못했다.

1926년 5월 8일 오후 5시, 김사국은 평생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에 헌신하다가 폐병이 악화되어 서른다섯에 불꽃같은 삶을 마감했다.

김사민(金思民, 1898~?)은 형 김사국의 여섯 살 아래 동생이다. 서울파의 영수였던 형의 그늘에 가려져 있지만, 김사민 또한 3·1운동 때부터 1920년대 중반까지 민족의 독립과 민중의 해방을 위해 불꽃처럼 살았던 청년 혁명가였다.

김사민은 형이면서 지도자인 김사국과 보조를 맞추며 조선노동대회 및 자유노동조합과 서울청년회, 그리고 고려공산동맹에서 경기 지역 오르그(조직책) 등을 맡으며 서울파 수뇌부의 한사람으로 활동했다.

자유노동조합은 지게꾼과 막벌이꾼 등 자유노동자 200여명이 참여해 1922년 10월 창립한 직업별 노동조합이다. 김사민은 자유노동조합 발기총회의 취지서 작성의 주도자로 지목되어 검거되고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1923년 2월 1일 그는 구치감 문을 열고 들어서는 간수의 머리를 칼로 찍어 중상을 입혔다. 김사민은 그로 인한 고문으로 심신이 모두 망가진 상태에서 1924년 7월 26일 만기 출소했다.

1928년 1월 5일, 남편 김사국 사후 1년 8개월 만에 그의 평생 동지이자 부인인 박원희가 죽었다. 그녀는 고려공산동맹원으로 그 자신이 쟁쟁한 사회주의 활동가이자 김사국·김사민 형제의 가장 가까운 동지였다. 그녀는 김사국의 유지를 실현하기 위한 활동을 하면서, 중앙집행위원으로 1927년 근우회 창립에도 참여했다. 한창 활동 중에 감기 기운으로 앓아누웠다가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갓난아이 딸 하나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김사국의 7주기인 1933년, 안국당과 김사민은 견지동의 청년총동맹 사무실 한 구석의 쪽방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김사민과 그의 어머니 안국당은 구걸로 연명했다. 폐인이 된 둘째 아들을 보살피며, 먼저 간 장남을 떠올려야 했던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김사국·김사민 형제는 민족독립운동의 투사이자 한국 사회주의운동의 개척자였다.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에 고통받는 동족들을 식민 지배의 쇠사슬에서 해방시키려 한 형제의 삶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분단과 냉전을 거치며 한국 사회는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인색했다. 이번 세기에 들어서 김사국·김사민 형제와 박원희가 독립유공자로 서훈되고, 대전 현충원에 안장된 것은 뒤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들의 딸 ‘사건(史建)’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이 가족을 기억해야 할 책임이 있다.(133~150쪽)

 

8. 아카’에서 빨갱이로, 혁명가 남매의 비극 : 김형선·김명시·김형윤

김형선(金炯善, 1904~1950)은 1904년 5월 7일에 경상남도 마산포 언덕배기의 빈민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생선 행상을 하는 어머니 김인석 밑에서 4남매가 자랐다. 그중에는 맏이인 김형선을 비롯하여 김명시(金命時, 1907~1949)와 김형윤(金炯潤, 생몰년 미상) 3남매가 식민지 해방 투쟁으로 감옥살이를 했다.

김형선은 1917년 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마산공립간이농업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학비를 내지 못해 한 학기 만에 중퇴하고 점원과 부두노동자로 일했다. 이후 마산창고회사의 서기로 5년여 동안 일하다가 실직하고, 1926년부터 <조선일보> 마산지국을 경영했다.

김형선은 노동자로 일하면서 마산청년회·마산노동회·마산해륙운수노동조합 등에 가입해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노동운동과 관련을 맺으며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김형선은 1924년 8월 5일에 마산공산청년회를 결성하고 같은 달 17일에는 마산공산당을 조직했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이 창립하자, 이 두 조직은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마산 야체이카(세포) 조직으로 각각 재편되었다. 김형선은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검속되었지만 금방 풀려났다

1926년 6월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가 시작되자, 그는 상하이로 피신했다. 1927년 1월에 광동성 광저우(廣州)의 중산대학(中山大學)에 입학했다가 곧 상하이로 돌아와 1928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중국공산당 장쑤성(江蘇省)위원회 법남구(法南區) 한인지부에 배속되어 한때 책임자로 일하기도 했다. 1929년 6월에는 재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에 가입했으며, 그해 10월 구연흠, 홍남표, 조봉암 등과 함께 상하이에서 유호한인독립운동자동맹(留滬韓人獨立運動者同盟) 결성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1930년 7월 중국공산당은 김형선에게 특별한 임무를 하달했다. 상하이에서 맡은 일을 정리하고 김단야와 협력하여 조선에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라는 명령이었다. 이러한 사명을 부여받은 김단야와 김형선은 향후의 활동 방향과 역할을 분담했다,

김형선은 1931년 2월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국내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조선으로 들어갔다. 김단야가 상하이에서 간행한 <콤뮤니스트>와 격문, 팸플릿 등을 국내로 보내면 김형선이 이를 배포하고 노동자를 조직했다.

처음에는 안동과 신의주에 마련된 연락 거점을 통해 잡지를 받았다. 상하이에서 <콤뮤니스트> 150부가 연락책인 독고전(獨孤佃)에게 전달되었다. 하지만 이런 다량의 운반은 위험하고도 어려웠기 때문에 원본을 가져와 국내에서 인쇄하기로 했다.

코민테른의 지시로 ‘콤뮤니스트 그룹’에 합류한 김형선의 여동생 김명시가 1932년 3월 중순 <콤뮤니스트> 4호 원본과 격문들을 트렁크 뚜껑에 숨겨 국내로 반입했다. 김형선은 경성과 인천 등지에서 출판물의 배포망을 만들며 활동했다. 김명시도 인천의 제사공장과 성냥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을 조직했다.

이들은 메이데이를 맞이하여 잡지와 격문 등을 뿌리며 선전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이 그룹의 활동이 발각되어 남매는 해외로 탈출을 시도했다. 김형선은 간신히 상하이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김명시는 신의주의 국경을 넘기 직전 압록강 부근에서 고등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여동생 체포의 슬픔과 자신을 잡으려 혈안이 된 일제 경찰의 집요한 추적을 무릅쓰고 김형선은 불굴의 의지로 다시 국내와 상하이를 오가며 활동을 이어갔다. 1932년 7월 당시 ‘콤뮤니스트 그룹’은  조선 안에 20개 안팎의 세포단체를 조직했고, 성원은 90명이었다. 김형선 혼자의 힘은 아니지만, 그의 책임 아래 이루어진 성과였다.

1933년 7월 15일 자정, 인천경찰서 수사대는 오랫동안 뒤쫓던 사상(思想) 관계 불령선인(不逞鮮人) 김형선의 은신처를 급습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스무 살의 홍운표라는 청년 뿐이었다. 포위망을 벗어난 김형선은 버스에 올라 영등포로 향했다. 영등포에서 오류동까지 걸어간 그는 다시 기차를 타고 소사로 갔다. 소사부터는 다시 걸었는데 김포로 잘못 들어섰다. 고민하던 김형선은 다시 경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승합자동차에 올라탔다. 하지만 경인가도에는 이미 촘촘한 포위망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형선은 결국 불심검문에 걸려 체포되었다.

여동생 김명시는 신의주 감옥에 있었고, 남동생 김형윤도 마산에서 이승엽과 비밀결사인 ‘볼세비키사’를 만들어 잡지 <볼세비키>를 제작·배포하면서 노동자를 조직해 적색노동조합을 만들려다가 체포되어 부산에서 형을 살고 있었다. 결국 김형선도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 갇히면서, 세 남매가 흩어져 동시에 부산·경성·신의주 감옥에서 징역살이를 하는 비극적 운명에 처하게 된다,

김형선은 8년 형을 선고받고 그 형기를 모두 채웠다. 일제 관헌은 수감 중인 그에게 전향을 강요했지만 그는 끝끝내 거부했다. 형기는 만료되었지만, 김형선은 ‘전향하지 않은 죄’로 ‘예방구금’되어 풀려나지 못했다. 김형선은 14여년의 감옥 생활을 벗어나 해방된 조국에서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그러나 해방의 감격은 금세 잦아들었고 그는 다시 고난의 길에 들어섰다. 해방 이후 김형선은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하여 조직국원이 되었고,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남조선노동당(남로당) 결성대회에서 의장단으로 선임되었으며, 남로당 중앙감찰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이 시기 그는 미군정 치하에서 되살아난 식민지 시절의 경찰들에게 체포되어 구금되는 신세가 되었다. 1950년 9월 한국전쟁 때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압록강 부근에서 체포된 김명시는 ‘조선공산당 재건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6년 형을 선고받았다. 예심 기간 1년을 포함하여 스물다섯에서 서른두 살까지 꼬박 7년의 청춘 시절을 차디찬 신의주 감옥에서 보냈다.

1939년 만기 출소한 김명시는 주저 없이 국경을 넘어 전선에 합류했다. 중국공산당 팔로군에 입대해 싸우다가 상하이에서 함께 활동했던 무정의 연락을 받고 조선의용군에 합류하여 화북지대 여성부대 지휘관으로 최전선에서 전투와 선전전을 벌였다.

또 1942년 결성된 ‘조선독립동맹’의 베이징·텐진 책임자로 일하며 허정숙과 여성동맹을 꾸리고 조선의용군을 모집하는 활동을 했다. 해방이 되자 평양으로 간 대다수 독립동맹원과 달리 경성으로 돌아왔다.

이후 김명시는 조선부녀총동맹 선전부 위원으로 활동했고, 1946년 2월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남조선여성동맹 선전부장 등으로 활동하다가 좌익에 대한 탄압 국면에서 석연치 않은 죽음(부평경찰서 유치장에서 목을 매어 자살)을 맞이했다.

김형선·김명시·김형윤 남매들은 수난의 삶을 살았고 그 최후도 비극적이었다. 부천경찰서에서 불행한 죽음을 맞은 김명시의 운명도 슬프지만, 김형선과 김형윤은 어디서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이 남매들이 묻힌 곳 또한 확실치 않다.

이 남매들은 ‘빨갱이’가 아니라 사회주의자였다. 그들은 조선의 독립을 열망했고, 투쟁을 통해 되찾을 새로운 나라가 빈곤과 차별, 불평등을 해소하고 진보적 복지국가가 되기를 열망했다. 그들은 8시간 노동제, 소작제의 혁파, 학교 교육의 민주화 등을 주장했으며 이를 위한 동력을 사회주의에서 찾았던 혁명가들이었다. 그들의 투쟁은 독립운동의 큰 줄기를 이루었고, 꿈꾸었던 급진적 이상들은 알게 모르게 한국 사회를 진보시키는 데도 일조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식민지 조선의 어둠에 맞서 싸웠던 투사들을 사회주의자였다는 이유로 외면해왔다. 아니, 단지 외면한 한 것이 아니라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악마화했다. 김형선은 사회주의자들을 ‘아카(赤, 빨갱이)’라고 부르면서 고문하는 일제의 특고(특별고등검찰)들에게 잡혔을 때 열두 시간 계속 고문을 당했다.

김형선과 김명시는 해방된 조국에서 다시 경찰에 붙잡혀 취조를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일제 특고에서 대한민국 경찰의 옷으로 갈아입은 이들이 그들 앞에 섰다. 김명시의 죽음이 타살인지 자살인지 명확치 않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아마도 자신을 ‘아카’라고 부르던 자들로부터 다시 ‘빨갱이’ 소리를 들으며 고통당하는 치욕을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분단과 전쟁을 거치며 한국 사회에서는 ‘빨갱이’라는 주술이 횡행했다. 독재에 저항하고 민주화를 염원한 수많은 사람이 ‘빨갱이’ 소리를 들으며 고문당하며 죽었다. 모두에게 묻고 싶다 ‘빨갱이’란 무엇인가? ‘빨갱이’는 고문당하다 죽어도 되는 존재인가?(153~174쪽)

 

9. 혁명가 집안에서 나고 자란 혁명가 형제 : 오기만·오기영·오기옥

오기만(吳基萬, 1905~1937), 오기영(吳基永, 1909~?), 오기옥(吳基鈺, 1919~1950?) 형제는 황해도 배천(白川)군에서 잡화상을 운영하던 오세형(吳世炯)과 윤인의(尹仁義)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 집안의 고난과 투쟁 그리고 자긍의 원점에는 3·1운동이 자리한다. 형제들의 아버지 오세형은 배천의 만세 시위를 준비한 주모자 중 한 명이었다. 잡화와 학용품을 파는 그의 가게는 동네에서 가장 큰 사랑방이었다. 그곳에서 마을 사람들은 숨죽여 태극기를 그렸고, 어린 형제들은 종이 태극기를 깃대에 풀칠해 붙였다. 3월 30일 배천 장날, 드디어 만세 소리가 터졌다. 시위에 나선 많은 이들이 붙잡혔다. 대부분 태형을 맞고 풀려났지만, 오세형은 해주 감옥에 이송되었다.

3·1운동의 열기가 잦아들던 12월 무렵, 이 집안의 둘째 아들인 열한 살의 오기영은 동급생 네 명과 함께 장날 시위를 모방한 만세 시위를 일으켰다. 학교에서 태극기를 만들어 장터로 뛰어나간 소년들에게 장꾼들이 동조해 만세를 불렀다. 곧바로 헌병대에 붙잡혀간 아이들은 교사 김덕원을 엮어 넣으려는 헌병보조원의 고문에 못 견뎌 거짓 자백을 하고 말았다. 이에 김덕원은 8개월의 징역을 살아야 했고, 소년 오기영은 그 굴복의 부끄러움을 내내 곱씹게 된다.

부끄러움에 휩싸인 또 다른 소년이 있었다. 열다섯 살의 오기만은 네 살이나 어린 동생만도 못한 자신을 책망했다. 이에 친구들과 만세 시위를 계획하던 중 발각되어 오기만을 비롯해 30여 명의 소년이 해주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오세형과 두 아들이 해주 감옥과 연안(延安)의 헌병 분견대에서 고초를 겪는 와중에, 윤인의는 “장차 또 감옥에 가야 할 운명을 운명을 걸머진” 막내 아들 오기옥을 낳았다.

해주 감옥에서 고초를 겪고 나온 소년 오기만은 1920년 경성 배재고등보통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식민지 현실에 눈을 뜬 오기만은 지배자의 규율을 강요한 학교 교육에 대해 점점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 오기만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유학온 친구 이남식의 여행증에 자신의 사진을 붙이고, 하숙비와 밥값 등 70원을 들고 중국으로 떠났다. 1922년 4월 무렵이었다. 이후 그는 2년여 동안 면학을 목적으로 베이징, 난징, 상하이 등을 전전했다. 그는 베이징사범대학 부속 하기(夏期)학교 및 안창호가 설립한 난징의 동명학원 영어과 등에 입학했으나 모두 중도에 그만두었다.

그러던 중 가세가 기울자 고향으로 돌아와서 부친을 도와 황무지를 개간해 과수원을 일구는 일을 했다. 경찰은 3·1운동 때 시위를 모의했고 중국에서 생활하다 돌아온 오기만을 감시하고괴롭혔다. 그럴수록 마음속 울분과 혁명에 대한 의지는 커져 갔다. 그는 신간회 배천(白川)지회 설립 준비위원회의 일원으로 설립대회 당일에 배포할 ‘삐리’를 준비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연백경찰서에 검속되어 고초를 겪고 해주지방법원에 송국되어 50원 벌금형에 처해졌다.

감옥에서 나온 오기만은 다시금 중국 망명을 결심한다. 신문기자가 된 동생 오기영이 만주 안동현(지금의 단둥)까지 배웅했다. 말없이 배갈을 나눠 마신 형제는 펑텐(奉天)행과 부산행 기차를 타고 각자의 길로 향했다.

오기만은 대륙을 가로질러 동아시아 혁명가들의 집합소였던 상하이로 향했다. 그는 중국공산당 산하의 한인 반제조직인 ‘상하이한인청년동맹’의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1929년 10월 26일 결성된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에도 참여했다. 이러한 활동 중 오기만은 1931년 6월 중순경 코민테른 원동부(遠東部) 부원인 김단야로부터 김형선과 협력하여 조선 내 적색노동조합을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 즉, 오기만은 ‘콤뮤니스트 그룹’의 일원이 되었다.

오기만은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의 기관지 <프로핀테른> 200부를 휴대하고 1931년 7월 15일 경성에서 김형선과 만나 국내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진남포에서 부두 노동자 생활을 하며 김찬 등과 함께 노조와 적색독서회를 조직했고, 평양 면옥노동자 총파업에 관계하는 등 각종 노동운동의 배후에 있었다.

하지만 1933년 국내 조직의 책임자 김형선이 체포된다. 오기만은 가까스로 상하이로 탈출했지만, 중국공산당 본부에 조선에서의 활동 상황을 정리한 보고서를 네 차례에 걸쳐 제출하고 활동 지시를 기다리던 중 체포되고 말았다.

1934년 상하이에서 경성으로 압송된 오기만은 5년 형을 선고받고 항소를 포기해 기결수가 되었다. 혹독한 고문과 서대문형무소의 열악한 환경은 불과 1년여 만에 축구선수였으며 육체노동으로 단련된 오기만을 폐결핵에 걸린 중환자로 만들었다.

죽어서야 나온다는 서대문형무소의 병감인 ‘오방(五房)’에 입감되었던 오기만은 회생 불가능한 몸이 되어서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동생 부부의 헌신적인 간호도, 병자의 변덕과 짜증을 묵묵히 받아낸 늙은 부모의 보살핌도 그를 살려내지는 못했다.

오기영은 형의 뒤를 따라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3학년 때 가세가 기울자 학업을 중단하고, 중국에서 돌아온 형과 함께 부친의 과수원 일을 도우며 마을에 소년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26년 11월 열여덟 살의 오기영은 <동아일보> 배천지국의 수습사원이 되었다. 신문사에서 주최한 “우리의 급무는 산업이냐? 교육이냐?”라는 주제로 열린 현상토론회에서 수상했으며, 배천청년회의 위원과 회장으로도 활동했다. 1928년 3월 17일에는 <동아일보> 평양지국에 기자로 입사했다.

스무 살 햇병아리에 학력도 변변치 않았지만 곧 그는 빼어난 취재 역량과 글쓰기 능력을 입증하며 민완(敏腕)의 사회부 기자로 자리 잡는다. 오기영은 늘 현장에 가서 민중의 목소리를 들었고 독자에게 그들의 말을 직접 들려주었다.

오기영은 1929년 10월 평양에서 수양동우회에 입단했다. 안창호 노선을 따르는 이 모임은 ‘신조선건설’을 지향한 동우회로 개편되었다. 그러다가 관련 지식인 181명을 검거한 동우회 사건으로 1937년 6월 11일에 오기영도 체포되었다.

1937년 7월 10일 기소유예로 풀려났지만, 사건의 여파로 그는 <동아일보>에서 해고당한다. 안창호가 서대문형무소에서 병보석으로 출소하여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투병하는 3개월 동안 오기영은 그의 곁을 지키며 간호했다. 안창호가 운명하자 일제 경찰은 민심의 동요가 두려워 안창호 장례에 가족의 참석을 불허했지만, 오기영은 경찰에 거세게 항의해 고당 조만식과 더불어 도산의 영면을 배웅할 수 있었다.

식민지 말기에는 동생 오기옥이 결혼식을 치른 지 일주일 만에 치안유지법으로 투옥되었다. 어릴 때부터 오기영의 집에서 자랐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까지 졸업시킨 자식 같은 동생이었다. 친일파에게 머리 숙이고, 신념을 버리고 전향한다면 풀려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오기영은 제수씨에게 자신이 구명운동에 나서더라도 동생은 결코 자기 신념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몇 달 뒤 해방을 맞이했다. 동생 오기옥과 감옥에 있던 막내 여동생 오탐열, 그리고 사촌 형의 아들인 오장석이 풀려나왔다. 그러나 해방 후 미·소의 분할 점령과 분단의 고착화로 이 가족의 수난은 계속되었다. 오기영은 경성전기주식회사에 입사해 해방 조선의 산업에 기여하고자 했다. 그는 경성전기의 인사과장, 총무부장, 업무부장으로 일했다.

하지만 오기영은 뼛속 깊이 문필가였다. 해방기의 혼란을 겪으며 그는 당시의 국제 정세와 국내 정치, 사회상과 생활상을 담은 정치평론과 칼럼을 각종 지면에 발표했다. <민족의 비원>, <자유조국을 위하여>, <사슬이 풀린 뒤>, <삼면불> 등 해방공간에서 출간한 그의 책 네 권에는 점점 고착되어가는 분단과 암울한 민족 현실에 대한 통찰 그리고 이를 타개하기 위한 우국지정이 담겨 있다. 하지만 한반도는 결국 분단되었고, 1949년 6월 그는 월북했다. 오기영이 어떤 생각으로 월북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북한으로 간 오기영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은 이전의 민주주의민족전선이 단정 수립 이후 확대 재편된 조직이었다. 어쩌면 그의 월북과 중앙위원 활동은 임박한 전쟁을 막으려는 안간힘이었는지도 모른다.(177~197쪽)

 

10. 악인전, 매국적과 창귀 : 선우순과 선우갑

선우순(1891~1933)은 1891년 3월 24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1908년에 안흥의숙을 졸업하고, 1910년 11월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했다. 1909년에는 서북·관서·해서 지역 인사들이 만든 애국계몽단체인 서북학회에서 활동했다. 당시 열아홉 살 선우순은 박은식이 주필로 있던 서북학회 기관지 <서북학회월보>에 6회에 걸쳐 <국가론의 개요>를 연재했다.

선우순은 1912년 6월에 매일신보사 평양지국 주필이 되었다. 이 무렵 선우순은 일본조합기독교회의 조선전도부 관계자의 도움으로 도시샤대학 기독교신학과에 유학한다. 1915년 4월 졸업하고 돌아온 그는 기성교회의 전도사가 되어 일본조합교회 전도에 앞장섰다.

선우순이 ‘직업적 친일분자’가 되어 본격적이고 노골적인 친일 활동을 시작한 것은 3·1운동 직후부터다. 그는 1919년 4월 3·1운동의 확산을 막기 위해 일본조합기독교회 주도로 전개된 ‘대시국특별운동’ 서선(西鮮) 방면 책임자로 활동했다. ‘배역유세단(排逆逾說團)’을 만들어 전국을 돌면서 만세운동에 참가하지 말 것을 종용했고, 중추원의 지방 유력자 모임 등에서 조선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논지로 강연을 했다. 이어서 민원식(閔元植) 등이 경성에서 조직한 국민협회와 함께 1920년대의 대표적 친일단체였던 대동동지회(大東同志會)를 창립했다.

3·1운동 이후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은 조선인의 민족운동에 대한 대책으로 직업적 친일세력을 만드는 작업에 치중했다. 사이토는 그들을 직접 면담하고 기밀비를 뿌렸다. 선우순은 1919년 8월부터 1926년 12월까지 사이토 총독을 119회 면회했는데 조선인 중에서 최다 면회자였다.

선우순은 공개적인 친일파였으며, 사이토 총독이 키우는 고등 정탐이었다. 총독과의 면담에서 그는 조선 지식인과 종교계 동향을 설명하고, <조선의 최근 상황과 대응책>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선우순은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이런 친일의 대가로 중추원 주임관 대우 참의와 평양부 협의원 등을 지냈다.

선우갑(1993~?)은 선우순의 두 살 터울 동생으로, 1893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의 성장 배경과 학력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가 일본의 고등계 형사와 밀정이 된 데에는 형 선우순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그렇지만 두 형제의 활동 범위는 매우 달랐다.

평양에 거점을 둔 정주형(定住形) 친일파인 형 선우순과는 달리, 동생 선우갑은 일본, 중국, 미국 등지를 종횡한 이동형 밀정이었다. 선우갑은 1920년 4월경 재미 조선인들의 독립운동 상황을 정탐하라는 조선총독부와 일본 경시청의 지시를 받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일본 외무성은 샌프란시스코의 일본 총영사에게 공문을 보내 선우갑의 신변 보호와 각종 편의를 지시했다. 조선총독부는 기밀비 2,000원을 지원했다. 선우갑은 임시정부의 대통령 이승만, 내무차장 현순 등에 대해 정탐하다가 1920년 10월경 조선으로 돌아왔다.

1925년 9월 초순 무렵 선우갑은 다시 베이징에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선우갑은 중국 정계의 주요 인물들에게 “동양평화를 목적으로 하는 아시아주의 운동의 중책”을 설명하며 신문 등을 발간하고 “재만주 불령선인과 지나(중국)의 무산운동의 연계를 파괴”하는 활동을 했다.

그가 끼친 해악은 밀정 활동에만 그치지 않았다. 선우갑은 1926, 1927년에 사기도박으로 2,300여 원의 돈을 편취했고, 중국 다렌과 함경도 함흥, 강원도 강릉에서 아편을 사다가 안동현, 평양 등지에서 중국인과 조선인 들에게 팔았다. 이외에도 안동현에서 비단 150여 필을 밀수하여 평양 포목상에게 넘겼다. 선우갑은 작은 권력을 탐한 밀정이었을 뿐만 아니라, 치부(致富)를 위해 민중 등을 속이고 아편 중독에 빠지게 한 말 그대로의 ‘창귀’였다.(201~220쪽)

 

11. 오빠들이 떠난 자리 : 임택재와 임순득

임택재(任澤宰, 1912~1939)와 임순득(任淳得, 1916~?) 남매의 본적은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면 월곡리 276번지다. 아버지 임명호(任命鎬)와 어머니 전주 이씨 사이의 2남 3녀 중 각각 2남과 막내로 태어났다. 임택재는 공립고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 4월에 고창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1925년 4월에 중앙고등보통학교로 전학했다가 1926년 다시 고창고보 2학년으로 재입학했다. 고창고보 학적부에 따르면, 그는 문예부 활동에 열심이었고 성적도 학급에서 2~3등 하던 수재였다. 1929년 3월에 고창고보를 졸업한 임택재는 4월에 일본 야마구치(山口)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입학 후 임택재는 “메마른 삶, 가난한 경치”의 고향 사람들에게 “성대한 만찬”을 주기 위한 투쟁의 삶에 뛰어든다. 1932년 1월에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오노다(小野田)시멘트 분회 명의로 반일 격문을 뿌렸고, 3월에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어 5월에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이때 검거된 이력 때문에 야마구치 고교에서 제적당했다.

귀향한 임택재는 경성제국대학 진학 준비를 위해 서울로 가서 1932년 10월경 이관술의 집에서 하숙하며 사회주의 활동을 했다. 이때 임택재는 이관술, 김도엽 등과 함께 조선반제동맹 경성지방결성준비위원회 운동을 주도했다. 이 조직은 1933년 1월에 와해되었다. 종로서와 동대문 경찰서에서 조사받고 풀려난 임택재는 <신계단>에서 기자생활을 했는데, 1933년 여름 무렵 동료 기자인 남만희의 소개로 이재유를 만났다. 이후 1934년 3월에 조선공산당 재건을 준비하던 이재유 그룹과의 관련 때문에 검거되었다. 이순금, 이경선, 김영원 등과 더불어 동생 임순득도 망라된 조직이었다. 1935년 12월 20일이 되어서야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아 2년여의 미결수 생활을 끝낼 수 있었다.

사회로 돌아온 임택재는 미곡상을 하면서 결혼도 했지만, “꽉 닫힌 조그만 껍질 속에 들어앉은 달팽이”처럼 웅크려 지내다가 1939년 2월 16일 스물여덟의 한창 나이에 폐병으로 사망했다. 2년여 동안의 육체적 고문과 정신적 압박이 병의 원인이었다.

출옥한 임택재는 임사명(任史冥)이라는 필명으로 죽기 전까지 <고향>, <어두운 방의 시편들>, <독백>, <말>과 유고시 <삼년, 또 십년> 등 총 5편의 시를 발표했다.

임순득은 고창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1929년 4월 서울의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3학년이 된 임순득은 1931년 6월 25일 이화여고보의 2, 3, 4학년 학생 300여명이 벌인 학생동맹휴학 사건의 주모자가 된다. 당시 경찰 기록은 이 동맹휴학을 서울계의 조선공산당 재건준비회 사건으로 파악하고 있다. 열일곱 살의 임순득은 어리다는 이유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학교 측은 석방된 임순득을 퇴학시킨다.

퇴학당한 임순득은 1932년 봄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동덕여고보에는 걸출한 사회주의 활동가인 이관술이 지리와 역사를, 한글학자 신명균이 조선어와 한문을 가르치고 있었다. 임순득은 1932년 10월 이관술의 지도 아래 이경선, 김영월과 함께 독서회를 꾸렸다. 1933년 1월이 끝날 무렵 이관술, 이경선, 임순득이 독서회 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체포된다. 이관술 집에 하숙하고 있던 임택재도 함께 검거되었다. 이 사건은 조선반제동맹 경성지방결성준비위원회 사건으로 확대되어 이관술은 학교에서 쫓겨났다. 임순득은 불기소처분을 받았지만 동덕여고보는 그녀를 퇴학시켰다.

동덕여고보에서 퇴학당한 이후 임순득은 일본의 도쿄여자고등사범 혹은 나라여자고등사범에 유학하다가 그만두고 귀국하여 조선미술공예사 기자를 거쳐 1937년 본격적으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민족과 계급의 해방을 외치던 오빠들이 죽거나 같히거나 전향한 빈자리에서 임순득과 그녀들은 묵묵히 글을 쓰며 신념을 지키거나 꿋꿋이 운동을 이어갔다. 특히 임순득은 젠더화된 한국문학사는 물론, 암흑기로 명명되며 삭제되었던 식민지 말기 일본어로 이루어진 한국문학을 다시금 사유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작가다. 해방 후 그녀는 북한에서 활동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임택재·임순득 남매의 삶과 문학은 식민과 해방, 분단과 냉전의 굴곡진 역사의 그늘 속에서 새로운 조명을 기다리는 많은 지식인·작가가 남아 있음을 알려준다.(223~243쪽)

 

12. 디아스포라 청년 시인의 죽음과 부활 : 심연수와 심호수

심연수(1918~1945)는 1918년 5월 20일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그가 여덟 살 되던 해 심연수 일가는 고향을 떠나 10년 동안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와 만주 등지를 떠돌며 어렵게 살았다. 심연수가 열여덟 살 되던 1935년에 일가는 북간도 조선인들의 문화적 중심지였던 룽징(龍井, 중국 지린성 옌벤조선족자치주의 도시)에 정착했다. 심연수는 1940년 스물세 살의 늦은 나이에 동흥중학교를 졸업하고 1941년부터 도쿄의 니혼대학 전문부 예술과에서 유학했다. 1943년 만주로 돌아와 교사로 일했다. 1945년 8월 8일 아내와 부모 형제가 있는 룽징으로 돌아오다가 왕청현(汪淸縣) 춘양진(春陽鎭) 기차역 근처에서 무장 군경에게 죽임을 당했다. 해방을 불과 일주일 앞두고서였다.

심호수는 1925년 1월 22일생으로 형 심연수보다 일곱 살 아래의 동생이다. 태어난 지 몇 달 만에 어머니의 등에 업혀 고향인 강릉땅을 떠났다. 심호수는 열한 살 때 룽징에 정착했고, 중학교를 마친 후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심연수의 유학경비조차 온전히 감당할 수 없었던 궁핍한 살림살이는 심호수에게 더 이상의 공부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심연수가 죽은 후 심호수는 아버지와 함께 형의 시신을 수습해 안장한다. 이후 심호수는 형이 남긴 유복자인 조카 심상룡을 보살폈다. 그는 조카뿐만 아니라 형이 남긴 또 하나의 자식, 즉 시인의 유고를 지키기로 결심했다. 문화대혁명의 광기는 옌벤 조선인 사회에도 몰아쳤다. 심연수의 유고들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었다. 일본 유학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일본 특무(밀정)로 몰리던 시절이었다.

심호수는 형이 남긴 원고와 자료들을 비료 포대나 시멘트 포대 등으로 꼭꼭 싸매어 큰 오지독(항아리)에 넣고 땅 깊숙이 묻었다. 장마철에 눅눅해지면 꺼내어 말렸다가 다시 넣어 보관하는 일을 해마다 반복하여 반세기 넘게 그것들을 지켰다.

심호수가 목숨을 걸고 지킨 심연수의 유고는 열 권으로 묶인 습작 시집을 비롯하여 소설, 비평문, 감상문, 1940년 한 해 동안의 일기와 심연수가 주고받은 각종 편지와 엽서, 조선과 만주 일대를 경유한 수학여행의 기록, 어린 시절부터 대학 때까지의 각종 학습장과 읽었던 도서류 등 그 자료를 찍은 이미지만 8,000여 컷에 이른다.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이만큼 다양한 장르의 방대한 육필 원고와 내면과 생활상을 함께 볼 수 있는 생활 기록을 남긴 작가는 없었다.

1999년 팔순을 앞둔 심호수는 형의 원고를 책으로 출판하는 게 자기 삶의 마지막 숙제라고 생각했다. 그는 시 원고 몇 편을 베껴 무단강출판사 등 여러 출판사에 보냈지만 응답이 없었다. 단념하지 않고 60여 편을 베껴서 다시 옌벤사회과학원에 보냈다.

옌벤사회과학원 문화예술연구소는 원고를 검토하고 심호수가 가지고 있던 대량의 유고 진본을 확인한 후 ‘심연수 문학연구 소조(팀)’을 결성하여 본격적인 정리에 들어갔다. 문화예술연구소의 상무편집위원 김룡운이 육필 원고를 분류·정리하여 옌벤인민출판사에서 <20세기 중국조선족 문학사료전집-제1집 심련수 문학편>이 출간되었다. 이로써 심연수의 유고가 빛을 보게 되었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 2000년, 죽은 지 56년 만에 심연수가 시인으로 부활한 것이다.(247~262쪽)

 

13. 혈연을 넘어선 이상의 형제들 : 모스크바 8진 형제

북한 정권은 1946년부터 국가를 이끌어갈 후세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유학생 파견을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조국을 부흥하고 발전시킬 과제가 주어졌다.

1952년 9월 4일 신의주유학생강습소에서 200여 명의 제7기 유학생이 소련으로 출발했다. 그중에는 영화학교를 지망한 허웅배, 한대용, 정린구도 포함되었다. 영화학교에서는 한 해 앞서 도착한 최국인, 리경진이 공부하고 있었다. 1953년에는 다시 양원식, 김종훈이 입학했고, 1954년에는 리진황이 영화학교 유학생 대열에 합류했다.

국제 사회주의의 수도였던 모스크바에는 각국의 유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그중에서도 북한 유학생들은 발군의 성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은 평소에도 자주 어울려 조국의 현실, 학업과 올바른 삶에 대해 토론했다.

대한제국기 의병장 왕산 허위의 손자인 허웅배는 1957년 11월 27일 모스크바광산대학 강당에서 열린 ‘제8차 재소 조선유학생 동향회’에서 김일성 개인숭배를 비판했다. 며칠 뒤 주소련북한대사관에서는 허웅배에게 만나서 그가 제기한 문제를 허심탄회하게 토의하자고 제안했다. 허웅배는 그 진정성을 믿고 대사관에 찾아갔지만 곧바로 붙잡혀 구금되었다. 강제송환과 숙청의 위기에 직면한 그는 대사관 화장실 창문으로 탈출한 후 소련에 망명을 신청했다. 소련 당국은 허웅배와 그의 연인인 의과대학 유학생 최선옥에게 ‘무국적’ 망명 허가를 내주었다.

허웅배의 망명 결행은 영화학교 동료 유학생들은 물론 소련에 있는 북한 유학생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주소련북한대사관은 영화학교 북한 유학생들이 허웅배에게 물들지 않았을지 의심했다. 영화학교 후배들은 반당 분자인 허웅배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면 귀국해서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이때 리경진, 최국인, 한대용, 정린구 등이 후배들을 설득했다.

최국인은 허웅배보다도 먼저 망명을 결심한 상태였다. 그는 종파 사건 직후 개인숭배가 심화되는 북한에서 양심을 속이고 수령만을 위해 봉사할 수 없다며 소련에 남을 결심을 허웅배와 리경진에게 밝혔다.

최국인과 리경진은 고민하는 후배들에게 허웅배를 비판하면 무사할 것이라는 판단이 지극히 순진한 생각임을 깨우쳐주었다. 북한 유학생들은 이미 제20차 소련공산당대회의 영향을 받았던 터라 조국에 돌아가더라도 종파 이론에 의해 이용만 당하다 숙청당할 것이라고 논리적으로 설득했다. 그들은 후배들이 정의로운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격려했다. 깊은 번민에 빠졌던 영화학교의 북한 유학생들은 집단 망명을 결정하고 향후 행동을 함께 하기로 결의했다. 개인숭배에 투항하는 대신 비판의 자유를 선택한 그들은 망명 요청서를 소련 당국에 발송했다.

1958년 6월 북한 대사관의 요청으로 영화학교의 북한 유학생 여덟 명은 학교에서 집단 퇴학을 당했다. 학교 기숙사에서 쫓겨난 그들은 모스크바 인근 도시 모니노(Monino)의 숲으로 가서 천막을 치고 지내기 시작했다.

어느 날 리경진이 남겨둔 메모 속 약도를 보고 먼저 망명한 허웅배가 찾아왔다. 허웅배는 동료들에게 “우리들은 이제 참사람이 되겠다는 뜻으로 같은 이름 진(眞)을 쓰도록 하자고”고 제안했다. 이후 허웅배(허진), 리경진(리진), 한대용(한진) 등은 결의대로 ‘진’이라는 이름을 죽을 때까지 사용했다.

마침내 1958년 8월 4일 소련 정부는 이들의 망명을 허용하고, ‘무국적 임시 거주증’을 발급했다. 소련 당국은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고려하여 정치적 회합을 통해 집단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망명 유학생들을 소련 전역으로 한 명씩 갈라놓았다.

이들은 대학교, 방송국, 극장, 신문사 등에서 교수, 감독, 극작가, 촬영기사 등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갔다. 그리고 편지를 통해 서로를 격려하고 때론 질책하며 민주적 공산주의 사회를 향해 이상을 지켜나갔다. 하지만 그들은 죽을 때까지 자신들의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들의 조국은 합리성을 회복하기는커녕 3대 세습의 왕조 국가로 타락했다. 그들에게 “소련 유학에서 습득한 지식으로 조국 인민에 보답”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265~28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