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잔의 추억
한 잔의 추억
내가 술을 시작한 것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18살 무렵이었다. 그때 나는 낮에는 논밭에서 일하고 밤에는 고향 친구들과 어울려서 놀았다. 친구들은 모두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나도 친구들을 본받아 담배를 피워보려고 했으나, 아무런 맛도 느낄 수 없어 그만 두었다. 그러나 술은 별로 부담이 되지 않아서 자주 마시게 되었다. 술을 입에 댄지 오래지 않아 친구들은 내 술이 제일 세다고 하였다.
교대에 다닐 때부터 나의 가장 오랜 술친구는 대학 동기인 병준이다. 병준이는 처음 몇 년간은 고량주, 다음에는 막걸리, 그 후에는 맥주를 주로 마셨다. 나와 대화가 잘 통하는 유일한 친구여서 같이 마시고, 이야기도 많이 했다. 총각 때는 월급봉투를 들고 신암동 룸살롱에 가서 술을 마신 적도 있었다. 내가 평리동 건물에서 살 때에는 1층 구이집에서 술을 마셨는데, 머리가 하얗게 센 병준이에게 말을 놓는다고 술집 아가씨로부터 꾸중을 듣기도 하였다. 병준이가 고등학교 교사로 자리를 옮긴 후부터 같이 대작할 기회가 적어졌지만, 동기회에서 만날 때는 옛날에 같이 술 마시던 생각이 나서 여전히 반갑다.
나는 초임 학교에서 6년을 근무하였는데, 3년이 지나면서부터 교감 선생님을 비롯한 10여명의 선생님과 오봉회라는 계를 같이 하게 되었다. 학교에서 맨날 만나는 선생님들끼리 계를 조직하고 한 달에 한 번씩 모였으니 하는 일이라고는 친목도모라는 미명하에 술마시고 노래하는 일이 전부였다. 처음에는 회원들 집을 순회하며 모이다가 나중에는 학교 소재지나 대구 시내 식당을 전전하며 모임을 가졌다. 대구에서 모일 때는 신암동 측후소 부근 막걸리집에서 많이 모였다. 주모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술이 어느 정도 되면 그 때부터 젓가락 장단에 맞추어 유행가를 불렀다.
6년이 지난 후에 초임학교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6학급 규모의 초등학교로 이동하였다. 학교로 가는 버스가 출근 시간과 맞지 않아 면소재지에서 자전거를 타고 통근하였다. 나는 초등학교 때 은사인 심선생님과 오토바이를 타고 출퇴근하는 김선생님과 셋이서 주로 술을 마셨다.
하루는 면소재지에서 소주와 막걸리를 섞어 마시고, 8톤 트럭을 탔다. 대구로 가는 도중에 술이 취하여 잠들었다가 잠결에 내리라는 말을 듣고 차문을 열고 내렸는데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계단을 두 번이나 밟고 올라가는 8톤 트럭 조수석에서 그냥 발을 내디뎠으니, 땅은 저 아래에 있었다.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입을 보도블럭에 박았다. 아랫입술 안쪽이 찢어지고 피가 났다. 그런데 술이 취하여서 그런지 그다지 아프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맥주집에 가서 다시 맥주를 마시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 다음 날이 되자 아랫입술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입술을 가리고 출근하여 양호실에서 대충 치료를 받았다. 입술의 부기가 빠질 때까지 거즈를 대고 반창고를 바른 모습으로 출퇴근해야 했다.
벽지 가산점이 주어지는 초등학교에 근무할 때였다. 영양사 외에는 교장, 교감, 1학년에서 6학년까지 모두 남자였다. 게다가 술을 못하는 분이 한 분도 없었다. 퇴근 버스가 종점까지 갔다 오는 30분 동안 학교 앞 가게에서 막걸리 한 박스를 모두 비울 정도였다. 봄 소풍 때 마신 소주, 맥주, 집에서 담근 술 등이 110병이었다. 어느 해 스승의 날에는 학교에서 가까운 계곡에서 술을 마셨는데 나는 양주에 취하여 돌아올 때 거의 업혀서 들어왔다.
내 사무가 봉급이어서 매월 17일이면 오후 1시 버스를 타고 면소재지 농협에 갔다. 봉급을 찾아 계산하여 일일이 봉투에 넣고 나면 학교에서 퇴근한 선생님들이 왔는데, 그냥 집에 갈 리가 만무하였다. 장터에 있는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 보면 어느새 12시가 넘었다. 모두 같이 술집에서 자고 다음 날 학교로 출근하였다. 밤새 노느라 새까매진 흰 양말을 뒤집어 신고 출근하는 분도 있었다.
1990년부터 건천읍 소재지와 고속도로 톨게이트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초등학교에 근무하였다. 퇴근 후에는 과학교육에 일가견이 있는 임선생님과 행정실에서 근무하는 최주사와 셋이서 고속버스정류장 부근 술집에 자주 갔다. 내가 고속버스를 타고 출퇴근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마시지는 못했지만 거의 매일 막걸리를 마셨다. 두 분이 대포잔으로 술을 돌리는 속도가 워낙 빨라서 몇 잔 마시고 나면 술이 취하였다. 가끔씩 건천읍 소재지까지 가서 술을 마시고 회관에 가기도 하였다.
1994년 구미시로 이동하여 박대통령 생가 마을의 초등학교에 근무하였다. 선배인 오선생님과 후배인 이선생님과 자주 어울렸다. 오 선생님은 맥주는 몇 박스를 마셔도 끄덕없었지만, 소주는 석 잔만 마시면 취하여 정신을 못 차리는 분이었다. 나는 대구에서 승용차로 출퇴근하였는데, 술을 좋아하다보니 음주운전을 하는 날이 많았다. 그 당시만 해도 음주운전 단속이 심하지 않아서 술이 취한 상태에서도 운전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구미에서 만취한 채 승용차(엑셀)를 몰고 출발하였다. 고속도로를 어떻게 달렸는지 모를 정도였다. 서대구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평리동으로 통하는 곧은 길을 가면서 자꾸만 눈이 감기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가 언뜻 눈을 떴는데 옆 차선의 승용차가 내 차 쪽으로 와서 부딪쳤다. 핸들을 꼭 잡고 차선을 유지하려고 했는데, 차는 맞은 편 주유소로 들어가서 주유기를 들이박고 멈추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마에서는 피가 나고 있었고 앞 유리는 깨어져 거미줄처럼 금이 나 있었다. 밖에 나와 보니 차의 앞부분이 거의 다 부서졌고 주유기 한 대가 넘어져 있었다. 술이 취하여 어찌할 줄 몰라 아내에게 전화하였다. 주유소 직원은 손해배상을 해주겠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나서, 음주운전이니 집에 갔다가 내일 오라고 하였다. 즉시 신고하지 않은 주유소 직원이 고마웠다. 다음 날 경찰서에 출두하여 교통사고 신고를 하였다. 며칠 후에 처음 충돌한 스텔라 차주와 만나 현장 검증을 함께 받고 교통사고 범칙금도 납부하였다. 파손된 주유기는 보험으로 배상하고 내 차는 폐차하였다. 그런데도 술을 끊지는 못하였다. 그 후에도 학교를 옮길 때마다 술을 마셨고, 그때마다 크고 작은 일들을 많이 겪었다.
나이가 들면서 술을 많이 마시면 필름이 끊기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답답한 일이다. 술에 취하여 잠을 잤다는 증언이 가장 많았지만, 간혹 실수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가급적 술을 마시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전문직에 들어가고부터는 술마실 기회도 적어졌다. 음주운전 단속이 심하여져서 대리운전을 하지 않으면 무척 불안하였다. 그래도 술을 끊지는 못하였다. 알맞게 마셔야지. 필름이 끊기지 않을 만큼, 실수하지 않을 만큼. 그러나 나는 아직도 한 번씩 폭음을 한다. 술자리에서 기분이 너무 좋을 때나 기분이 너무 나쁠 때.(2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