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약속과 변명

kdy820 2022. 5. 15. 20:35

올해 3월에 시니어매일 부장이 되었다. 17명의 부원이 올린 기사를 승인하고, 한 달에 한 번씩 시니어매일 본부에서 개최되는 부장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주된 업무이다. 지난달 부장회의가 끝나고 신문사 맞은편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식사 자리에 참가한 사람은 단장과 본부 부장, 취재 6부 부장 중 3명이 참석하여 모두 5명이었다.

식사 전에 술을 마시는 것이 관례이고, 주류와 비주류로 나누다 보니 단장과 같은 자리에 앉게 되었다. 맥주와 소주를 섞어 쏘맥을 만들고, 안주는 참가자미회였다. 계산성당 주차장에 승용차를 주차해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오랜만에 만난 술을 거절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차를 운전하여 집에 갈 요량으로 조금씩 마시다가, 이왕 먹는데 마음껏 마시고 대리운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부터 저녁 식사를 마칠 때까지 두당 맥주 2병 소주 1병을 마시게 되었다. 술기운에 기분이 좋아져서 다음 회의 때는 차를 두고 와서 주량을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다.

한 달이 지나고 부장회의를 하는 날이 되었다. 오후 4시경에 도서관에서 나오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대구 경계에 들어서자 빗방울이 굵어졌다. 이시아대로에서 공항교로 나오기 훨씬 전부터 차가 정체되기 시작했다. 원래 계획으로는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두고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하여 본사까지 가기로 했으나 시간이 너무 늦어져서 차를 운전하여 바로 가기로 했다.

이번 달 회의가 끝난 후에 단장이 무료주차권을 나누어주었다. 내가 주차권이 필요하다고 하자 깜짝 놀라면서 ‘차를 가져오지 않기로 했잖아요?’라고 물었다. 비가 오고, 길이 막혀서 어쩔 수 없이 차를 가지고 왔다고 변명했다. 단장은 얼굴에 실망한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고, 나는 지난달에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무척 미안하였다.

저녁 식사 자리는 즐겁지 못했다. 마지 못해 술을 마시고 저녁을 먹고 나왔다. 단장은 식당에서 나와서 작별 인사를 하고는 다시 식당으로 갔다. 차를 운전해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약속을 지키지 못한 행동을 후회하였다.

평소에는 약속을 잘 지키다가 술자리에서 한 약속은 왜 가볍게 생각했을까. 겉으로는 주량을 과시하고 싶었지만, 속으로는 마시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날씨 탓을 했지만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날씨가 나빠지는 경우도, 차가 밀리는 경우도 고려해야 한다. 결정적으로 도서관에서 출발하는 시각이 평소보다 30분 가량 늦었다. 일부러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고 한 것이 분명하다.

술을 마시고 기분이 좋아지면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는 사람을 많이 본다. 나는 조금 취했을 때는 말이 많아지고, 많이 취하면 졸다가 잠을 잔다. 도시철도에서 잠을 자다가 내려야 할 역을 놓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번번이 실패하지만 가급적 취하지 않을 정도로 술을 마시려고 노력한다. 과음을 하지 않겠다는 잠재의식이 약속을 어기게 만든 주범인 것 같다. 

약속에는 중요한 약속이 있고, 가벼운 약속이 있다. 취업을 결정할 면접은 중요한 약속에 속한다. 술자리에서 한 약속은 가벼운 약속에 속한다. 그래도 술꾼은 술자리 약속을 지켜야 하지 않을까? 지켜야 할 약속을 어기고 변명을 늘어놓아 나에 대한 평소의 이미지를 깨뜨린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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