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산책

벌새

kdy820 2023. 3. 29. 05:35

 

1. 개요

2019년 8월 29일에 개봉한 한국의 독립 영화.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일어난 1994년을 배경으로 은희라는 여자아이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2018년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넷팩상/관객상, 제44회 서울독립영화제 새로운 선택상/집행위원회 특별상을 비롯 제69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제18회 트라이베카국제영화제, 제45회 시애틀국제영화제 등 세계의 여러 영화제에서 총합 34개 부문에서 수상받으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19년 제40회 청룡영화상에서 김보라 감독이 해당 작품으로 각본상을 수상하였다. 수상 소감이 백미인데 지금도 상영 중이라고 홍보하였다. 2020년 '제56회 백상예술대상 감독상을 수상하며 59개상을 수상했다.


2. 줄거리

1994년 서울 대치동. 중학교 2학년 김은희(박지후)는 떡집을 하는 부모님(은희 아빠-정인기, 은희 엄마-이승연)과 언니(박수연), 오빠(손상연)와 함께 살고 있다. 서울대를 목표로 공부하며 툭하면 은희를 때리는 오빠와, 그런 오빠에게만 관심 가지는 부모님, 남자친구와의 연애에만 관심 있는 언니는 집안의 막내인 은희에게 별 관심을 주지 않는다. 은희에게는 그나마 유일한 친구인 지숙(박서윤)과 남자친구인 지완(정윤서)과의 관계에서 활력을 찾는다.
어느 날 은희가 다니는 한문학원에 김영지(김새벽) 선생님이 새로 부임해 온다. 영지 선생님은 다른 어른들과는 달리 은희의 마음을 이해하며 관심을 끈다. 그 무렵 은희네 외삼촌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심란한 은희는 장례식장에서 지완에게 연락을 해보지만 닿지 않는다. 며칠 뒤 지완은 다른 여자아이와 노는 모습이 목격된다. 은희는 이후 지숙과 함께 '날라리'의 명소 아베크 노래방에서 놀다가, 학교 후배인 유리(설혜인)를 만난다. 은희를 동경해 왔다는 유리와 은희는 서로 번호를 교환한다. 유리에게 받은 꽃 한 송이를 들고 집으로 돌아온 날 부모님은 밤중에 남자친구를 만난 언니를 두고 부부싸움을 하다가 엄마가 아빠에게 유리스탠드를 던져 피를 흘리게 한다. 은희와 지숙은 문구점에서 물건을 훔쳤다가 주인 사내에게 적발되는데, 사내가 은희네 부모님 직장을 물어보자 지숙이 대답을 해버린다. 댁의 딸이 도둑질을 했으니 경찰을 부르겠다는 사내의 말에 전화 속 아빠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사내는 어쩔 수 없이 은희와 지숙을 보내주고, 은희는 부모님 번호를 말해버린 지숙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둘은 사이가 벌어진다. 외톨이가 된 은희는 유리와 노래방을 다니며 조금씩 친해진다.
은희의 귀 밑에 작은 혹이 생기고, 엄마는 외삼촌이 다녔다는 작은 병원으로 은희를 보낸다. 몇 번을 오가며 수술까지 하는데, 병원에서는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고 더 큰 병원에 가서야 제거 수술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아빠는 수술과 부작용 이야기를 듣고 갑작스레 울음을 터뜨린다. 입원이 결정된 뒤 은희는 지숙과 화해를 하고 지완도 미안하다면서 은희를 찾아온다. 입원 직전 은희는 영지 선생님을 찾아가 책을 선물한다. 입원한 은희에게 유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찾아온다. 유리는 은희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둘은 입을 맞춘다. 그 무렵 텔레비전에서 김일성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다.
퇴원한 은희는 한문학원에 갔다가 영지 선생님이 갑자기 그만두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원장 선생님에게 물어 영지 선생님이 짐을 가지러 오는 날을 알게 되지만, 그 날 찾아가 보니 영지 선생님은 이미 가버린 후였다. 시간을 잘못 알려준 원장이 영지 선생님의 험담을 하자 은희는 큰 소리로 반박하며 학원을 그만둬 버린다. 이 때문에 부모님은 은희를 야단치고 은희는 큰 소리로 난동을 피우고, 오빠가 달려들어 은희의 귓방망이를 후려친다. 다음날 병원에서 은희는 고막이 터졌다는 진단을 받는다. 한편 새 학기가 되어 등교한 은희는 유리를 만나 반갑게 인사하지만 유리는 은희를 피한다. 자기를 좋아하는 것 아니었냐는 은희의 말에 유리는 지난 학기 일일 뿐이라고 대답한다.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터진다. 은희는 성수대교를 건너 학교를 다니는 언니를 걱정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언니는 그날 버스를 늦게 탄 덕분에 목숨을 건진다. 은희는 영지 선생님으로부터 소포를 받는다. 영지 선생님은 책을 돌려주면서 은희에게 스케치북을 선물하였다. 은희는 소포에 쓰인 주소를 찾아가는데, 영지 선생님은 성수대교 사고로 목숨을 잃은 뒤였다. 어느 새벽 은희는 언니와 언니 남자친구의 차를 타고 몰래 집을 나선다. 세 사람은 강변에 서서 끊어진 성수대교를 바라본다. 이후 수학여행을 가게 된 은희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영화가 끝이 난다.

 

3. 평가

(1) 폐허를 응시하다

공권력은 폐허를 감춘다. 폭력과 재난이 발생한 곳의 삶은 폐허일 수 밖에 없지만, 공권력의 화장술은 폐허의 사금파리들을 시야에서 흔적도 없이 치워버린다. 공권력이 폐허를 가리고 덮어 사람들의 망각을 부추길 때, 예술가들은 사람들에게 폐허를 애써 상기시킨다. 영화 <벌새> 역시 그런 폐허로 초대한다. 1994년 10월 21일, 한강에 위치한 성수대교의 상부 트러스가 무너지며 총 49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오늘날 말끔해진 성수대교를 달리는 차량 운전자 중 1994년의 폐허를 상상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영화 <벌새>는 폐허가 된 과거의 성수대교 앞으로 관객을 불러모은다.

상영 시간 내내 <벌새>는 한국의 건물이나 교량 안전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 <벌새>는 성수대교 붕괴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비극이 왜 일어나야만 했는지를 탐구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살아온 일상이 일견 깔끔해 보여도 사실 폐허임을 꼼꼼히 증명한다. 상처받은 자존심으로 일그러진 가장, 폭력으로 얼룩진 남매, 거짓과 관성 속에서 나날을 이어가는 부부, 교육목표에서 한참이나 멀어진 학교, 그 모든 삶의 국면에서 버티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마저 모두 폐허임을 상기시키는 긴 여정을 거쳐, 성수대교는 비로소 무너진다. 그리하여 관객들은 성수대교가 하나의 부실한 물리적 구조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전체를 상징하는 폐허임을 납득하게 된다. <벌새>를 본다는 것은 이 사회가 폐허가 되는 과정을 추적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폐허였는데, 아 폐허였구나 하고 새삼 깨치는 과정에 가깝다.

<벌새>의 세계에 희망이 있다면, 이 폐허의 흔적을 서둘러 치우기 때문이 아니라, 폐허의 주인공들이 스스로 폐허를 보러 가기 때문이다. 성수대교 붕괴로 <벌새>의 주인공 은희의 언니는 학교 친구들을 잃고, 은희는 유일하게 의지했던 사람인 한문학원 영지 선생님을 잃는다. 선생님이 아직 이 세상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때, 은희는 선생님께 물은 적이 있다. "자신을 싫어할 때도 있나요?" 선생님은 말했다. "자신을 좋아하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아. 내 자신이 싫어질 때면, 그러는 내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봐."

어느 날 은희는 가정폭력의 여파로 깨져 나갔던 스탠드 조각을 우연히 발견하게 된다. 폭력의 흔적이 깨끗이 지워진 줄 알았건만 유리 조각이 소파 밑에 남아 과거의 재난을 증명한다. 그제서야 폐허는 당장 눈에 보이지 않아도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섭리를 받아들인 양, 은희는 성수대교로 향한다.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선생님을 어느날 예고 없이 수장한 그 폐허를 보러 나선다. 새벽에 한강으로 달려간 은희, 은희의 언니, 언니의 남자친구는 동이 터오는 어스름 무렵 무너진 성수대교를 묵묵히 바라본다. 그때 성수대교는 곧 치워져야 할 잔해가 아니라 스스로 폐허를 찾아온 이들을 위한 묵상의 대상이 된다.

부서진 성수대교는 말한다. 삶은 온전하지 않다고, 이 세상에 온전한 것은 없다고, 과거에 무엇인가 돌이킬 수 없이 부서져버렸다고, 현재는 상처 없이 주어진 말끔한 시간이 아니라 부서진 과거의 잔해라고, 그러나 그 현재에 누군가 살고 있다고, 폐허를 응시했을 때 인간은 관성에서 벗어나 간신히 한 뼘 더 성장할지 모른다고, 성장이란 폐허 속에서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채 폐허를 바라볼 수 있게 되는 일이라고. 마치 W. G. 제발트의 소설이 그러한 것처럼, <벌새>는 우리를 폐허 속으로 데려가고, 그 폐허 속에서 우리는 영지 선생님이 태우는 담배 연기처럼 고양된다.(김영민,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30~34쪽) 

   

(2) 시대의 주름을 펼쳐 다린, 회상의 영화. 그 시절 바랐던 걸 이제야 들려주는, 환상의 영화.

시대의 기억과 개인의 시간을 살포시 겹친 후 나지막이 읊조린다. 세상은 언제나 내 기대보다 나에게 무심했다고. <벌새>는 누군가 기억하는 ‘사건’이 아니라 누구나 한번은 경험했을 ‘감각’을 다루는 영화다. 따뜻하고 불안한, 모순된 감정들은 순차적으로 오지 않고 곳곳에 동시에 흩어져 있다가 문득 되살아난다. 감독은 자전적 기억을 바탕으로 그 시절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들을 촘촘히 되새기는 가운데 적당한 거리두기를 통해 개인적 체험을 보편적 이야기로 연결시킨다. 누구나 한번은 거쳐 갔을 시절에 대한 기시감, 일상을 포착하는 섬세한 관찰력, 그리고 배우들의 차분한 온도. 상처를 밀어내고 지우는 대신 끌어안으면서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는 방법을 넌지시 일러준다.(송경원, 씨네21)

 

(3) 아름답고 슬픈 오늘을 쌓아가는 것, 살아간다는 것

일상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만남. 영화 <벌새>는 가장 보편적인 삶의 궤적을 좇지만, 관계의 작은 변화와 감정의 미세한 진폭을 절대 놓치는 법이 없다. 아름답고 때로는 슬픈 오늘을 쌓으며 서로의 마음에 흔적을 남기는 것, 하루를 내디딜 때마다 몸에 밴 시대의 내음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 살아가는 것임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누구나 문득 영화 속 어느 날에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는 특별하고 놀라운 경험.(심규한, 씨네플레이)

 

(4) 삶, 고단하고 아름다운 날갯짓을 멈출 수 없는 우리 모두의 것

대한민국, 1994년, 중학교 2학년 여자아이. 은희(박지후)를 설명할 수 있는 조건들만 본다면, 특수한 표본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벌새>는 개인과 한 가족에서 출발해 한 시절의 공기를 담고 끝내 영화를 보는 모두의 마음으로 깊숙이 침투한다. 그 과정에서 영화가 발휘하는 보편성의 힘은 놀라울 정도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바람, 새롭게 맺고 다시 단절되는 관계들, 크고 작은 일상의 균열들을 경험하고 상처 입다가 다시 누군가의 온기로 회복하는 기쁨, 세상이 돌아가는 작동 원리를 이해할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의 옅은 열패감…<벌새>는 그 모든 순간을 통과하는 인물들의 마음 그 자체다. 세밀한 관찰이자, 마음을 휘어잡는 기록이다. 삶이라는 고단하고 아름다운 날갯짓을 긍정하는 노래다.(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5)  가장 평범한 소녀가 쓴 대서사시

1994년, 중학생이 받아들이기엔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던 세상에서 은희(박지후)는 어떻게든 삶을 이해해보려고 애를 쓴다. 김보라 감독의 첫 장편 영화라는 것을 믿기 힘들 정도로 <벌새>는 보기 드물게 탁월하다. 틀에 박힌 아파트 풍경이나 폭력과 무관심, 애정이 뒤섞인 특별할 것 없는 가족에게서조차 신비로운 순간을 추출해낸다. 영화는 모든 평범한 소녀들을 호명하며 종국에는 그들을 은희 하나로 엮어 대서사시를 완성한다.(이지혜, 영화 저널리스트)

 

(6) 은희가 감응하는 한국 사회의 '징후'들, 영지라는 길잡이 항해사를 만나 다행

<벌새>는 나도 궁금했고, 아마도 당신도 궁금했을 테고, 은희도 그렇게 궁금했던 세상의 풍경을 마치 타임워프 안경을 끼고 보는 듯 생생하게 묘사한다. 한문학원 김영지 선생님(김새벽)은 은희에게 의문 부호로 이루어진 세계에 예고 없이 등장해 길을 일러주는 ‘항해사’ 역할을 한다. 강남과 강북, 빈부의 차이가 드러나는 ‘어른’의 세계에서, 길을 헤매지 않도록, 다그치거나 주입하지 않고 친구처럼 조곤조곤 일러주는 존재. 은희가 응시하는 시선 속에 김영지 선생님이 있어줘서, 다행이다. 그렇게 은희는 그녀가 전해준 에너지, 자양분을 통해 성장해 나갈 거라는 믿음에 안도가 전해진다. 데뷔작을 통해 놀라운 세계관, 더불어 단단한 여성의 시선을 보여준 김보라 감독의 출현은 그 자체로 한국영화의 사건으로, 더 좋은 미래로 기록될 만하다.(이화정, 씨네21)

 

(7) 개인의 경험담이 보편의 감성으로 확장되는 마법

1994년 은희(박지후)라는 소녀의 일상을 느린 걸음으로 따라가다 보면, 이 영화가 은희의 1년 성장사일 뿐 아니라 시대의 기록이란 걸 눈치채게 되는 순간이 온다. 영화는 한국 사회에 슬픔을 안긴 ‘성수대교 붕괴 사건’을 경유하며 우리가 무엇을 잊고 지내는지, 시대의 참사가 개인의 삶에 어떤 테두리를 남기는가를 바라본다. 은희의 이름을 지우고 그곳에 자신의 이름을 대입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것은 일상의 공기와 에피소드를 구체적이고도 생생하게 포착해 구현해 낸 연출 덕분이다. 한 개인의 경험담이 다수 관객의 보편적 감성을 건드리는 마법. 1994년 대한민국에서 한 소녀가 겪는 내밀한 일상이 세계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 이유이기도 할 테다.(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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