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11월 12일(음력)에 태어나신 어머니. 18살에 동갑인 아버지와 혼인하여 2남 2녀를 낳아 키우시고, 4남매 모두 대학 이상 졸업을 시켰다. 어머니 평생 소원은 자식들이 공부를 많이 해서 농사를 짓지 않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가난한 집안에 시집오셨다. 자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서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버지와 함께 열심히 농사를 지으시고 물건을 아껴 써서 절약하는 길 밖에 없었다. 내가 어릴 때 어머니는 호롱불 밑에서 아버지와 우리 형제자매의 헤어진 옷과 구멍 난 양말 등을 기우시고, 내의를 뒤져 이와 서캐를 잡는 모습이 기억난다. 화장품도 아껴서 바르고, 작은 플라스틱 통에 든 약을 바를 때도 얇게 펴서 발랐다.
어머니는 식사 시간에 항상 아버지와 자식들이 먼저 먹고 남은 밥을 드셨다. 닭백숙을 했을 때는 닭껍질이 제일 맛있다면서 살코기는 드시지 않으셨다. 어머니께 닭껍질을 드시지 말라고 하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된다.
부모님은 농사를 짓고 소를 키우고, 아끼고 절약한 돈으로 농토를 마련하고 과수원을 장만하셨다. 벼농사를 지을 때는 논마다 옮겨 다니면서 소독을 해야 했고, 홍옥과 국광이 주된 품종인 과수원에서는 일 년에 12번 이상 소독을 해야 했다. 어머니는 길이가 긴 논의 논두렁에서 호스를 당길 때는 너무 힘이 들어 창자가 나올 정도로 힘들다고 하셨다.
그렇게 힘든 일을 하면서도 자식들에게는 공부만 하라고 하셨다. 공부하는데 드는 돈은 끝까지 주신다고 하셨다. 실제로 동생이 치과대학을 다니고 치의학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내가 교대 졸업 후 사립대학교에 편입해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학기마다 빠짐없이 등록금을 마련해주셨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대구로 전학 가서 작은아버지 집에서 지냈다. 어머니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장남으로 자라다가 갑자기 환경을 바뀌어서 학교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밤마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 이불 속에서 혼자 울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어머니가 보고 싶어 시골집까지 걸어간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공부하지 않고 왔다고 집에도 들이지 않았다. 이발소에서 내 머리를 깎여서 다시 대구로 보냈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공부가 하기 싫어 가출했다.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짓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지만 내가 1년 6개월 후에 다시 공부를 시작하고, 고졸학력검정고시를 치를 때는 갓바위에 가서 하루종일 기도했다. 그 후 중요한 시험이 있을 때마다 어머니는 갓바위에 가서 기도했다. 내가 지금까지 공부하고, 직장 생활을 하고, 건강하게 무사히 지내 온 것은 모두 다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1982년에 결혼했다. 결혼 1년 후에 첫 딸이 태어났다. 부부교사여서 아내의 출산 휴가가 끝난 후에는 딸애를 맡길 곳이 없었다. 농사일에 바쁜 어머니에게 딸을 맡겨서 유치원에 입학할 때까지 돌봐 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출생 후 3개월 된 손녀를 맡아 우유를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 돌보면서 농사일을 다 하셨다. 얼마나 힘드셨을까. 손녀를 키운 4년 동안 어머니 얼굴에는 주름살이 많이 늘었다.
연세가 들어 농사일이 버거워졌을 때는 평생에 걸쳐 장만한 과수원과 전답을 팔아 자식들의 생활을 뒷바라지했다. 그러고는 갓바위 입구에 앉아 하루종일 농산물을 팔았다. 자식들이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어머니는 2007년에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다. 종합병원 응급실에서 의사가 어떠냐고 물었을 때 괜찮다고 대답하셨다. 평생 아껴 쓰느라 병원에 잘 가지 않으셨는데, 그 날도 병원비가 걱정되어 그렇게 대답하셨을 것이다. 중환자실에 입원한 후 퇴원하셨는데 뇌경색 후유증으로 언어가 분명하지 않았고, 늘 춥다고 하시면서 여름에도 두꺼운 옷을 입으셨다. 몇 년 후 허리를 다친 후에는 자리에 누워서 지내시게 되었다. 치매가 찾아오고, 말을 잃었다. 재작년부터 밥을 드시지 못하고 죽만 드셨다.
나는 2019년 7월 8일 저녁부터 금강경을 읽기 시작했다. 1년이 지난 7월 8일 새벽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내가 태어난 후 어머니와 함께 한 처음 기억은 어머니의 등에 업혀서 연못에 핀 연꽃을 본 것이었다. 하늘은 맑고 날씨는 따뜻하고 연꽃은 아름다웠다. 평생을 남편과 자식을 위해 사신 어머니는 지금 부처님과 함께 연화세계에 계시지 않을까.
나는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받기만 하였다. 꿈 속에서라도 어머니를 만난다면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하지 못한 말을 꼭 하고 싶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2020년 9월 13일, 매일신문 ‘그립습니다’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