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독서 이력서

kdy820 2011. 5. 9. 11:45

독서 이력서


  초등학교 시절, 내 꿈은 소설가였다. 3학년 때 어린이 잡지에서 읽은 ‘꽁지 닷 발 주둥이 닷 발’ 이야기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여름 방학 때, 냇가 버드나무 그늘 아래서 작은아버지가 가져온 ‘로빈훗의 모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등을 읽으면서 ‘나도 이렇게 소설을 잘 쓰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5학년 때, 대구로 전학 와서 작은집(숙부님 댁)에서 지내면서 낮에는 만화책, 밤에는 동화책을 읽는 생활을 계속하였다. 마땅한 친구가 없었던 나는 공부를 마치면 학교 앞 만화가게에서 저녁때까지 만화책을 읽었다.

  작은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고모가 살고 있었다. 양계장을 하던 고모는 내가 놀러갈 때마다 달걀을 하나씩 주었는데, 나는 그 달걀을 먹지 않고 있다가 동네 가게에 팔고 그 돈으로 만화방에 갔다. 이서지의 ‘뿔’, 임창의 ‘땡이와 로봇’, 경인의 ‘용가리’, 이근철의 ‘카르타’ 등이 생각난다.  

  밤에는 작은아버지가 가져온 동화책이나 소년소설을 읽었다. 하루에 한 권씩 읽었는데 7시부터 읽으면 9시경이면 다 읽을 수 있었다. 작은어머니는 내가 책을 워낙 빨리 읽어서 그림만 본다고 하였다.


  6학년 때는 만화방에서 지내느라고 숙제도 하지 않았다. 그 다음 날 아침에 학교에 가서 부리나케 그 전날 숙제를 했다. 학반에서 부반장을 하던 나는 공부가 끝나면 아이들에게 청소를 시키고는 만화방에 가서 만화를 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만화를 보고 교실에 오니 아이들은 없고, 선생님만 있었다. 중학교 입시에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 매일 시험을 치고 점수가 조금이라도 내려가면 종아리나 엉덩이를 맞던 때여서, 엄청나게 맞았다.  

  조카들이 그랬는지 몰라도 작은집 마루에 있던 저금통은 아래쪽이 칼로 그어져 있었다. 나는 칼을 이용하여 저금통에서 동전을 꺼내 그 돈으로 만화를 봤다. 토요일이나 일요일도 만화를 보고 다니다가 작은아버지에게 혼이 나기도 하였다.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부터 만화책이 탐이 나서 훔치기 시작했다. 그 당시로서는 제법 두꺼운 만화책들이었다. 만화책을 고르는 척 하면서 입고 있던 스웨트를 걷고, 허리띠를 맨 바지와 배 사이에 만화책을 넣고 다시 스웨트를 덮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만화방을 나왔다. 한 군데 만화방에서 훔치고 나서는 다른 만화방에 가서 훔치는 생활을 한 동안 계속하였다. 박기당이 지은 ‘돈벌레’ 다섯 권을 그렇게 하여 다 훔쳤다.

  그러다가 하루는 눈치 빠른 만화가게 주인에게 들키고 말았다. 내가 배에다 김종래가 지은 만화책을 넣고 나오는데, 나를 붙잡더니 책을 꺼내는 게 아닌가. 그리고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 묻기 시작하였다. 나는 대강 대답하다가 주인이 한 눈을 파는 사이에 재빨리 만화방에서 달아났다. 그 다음부터는 만화방에 갈 수가 없었다.  


  누나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작은집에서 나와 비산동 이모댁에서 같이 자취를 하였다. 누나가 빌려온 무협지를 날마다 읽고, 소설은 서점에서 구입하여 읽었다. 한 번은 서점에서 구입한 ‘폭풍의 언덕’을 읽고 있는데, 직장에서 퇴근한 누나가 공부는 하지 않고 책만 읽는다고 나무랐다. 쓸데없는 책을 사는데 돈을 너무 많이 쓴다는 것이었다. 나는 화가 나서 읽고 있던 책을 찢어버렸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목숨보다 아끼던 책을 찢은 것을 후회하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나를 대구로 전학 보낸 아버지는, 내가 고향에 갈 때마다 ‘농사짓는 일이 얼마나 힘드는지 아느냐, 농민들은 모두 헐벗고 굶주리고 있다, 너는 아버지처럼 살아서는 안된다, 공부만 열심히 해라, 네가 원한다면 끝까지 공부시켜 주겠다. 공부하기 싫으면 언제든지 와서 농사를 지으라.’고 늘 이야기 하였다. 아버지는 내가 열심히 공부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말이었겠지만, 나는 그 말을 그대로 믿고 공부하기 싫으면 농사를 지으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중학교 3학년 때 펄벅이 지은 ‘대지’를 읽었다. 왕룽과 오란이 땅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은 한평생 농사를 지으신 부모님의 모습과 겹쳐지면서 나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농사를 짓는 것이 이렇게 좋은 일인데 아버지는 왜 공부를 하라고 할까. 공부하기 싫으면 농사를 지으라고 했으니 이제부터는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지어야겠다. 나는 ‘대지’를 읽고나서 공부를 그만 두고 농사를 짓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래서 고등학교 1학기를 마치고 가출했고, 그 뒤 학교를 그만 두었다.

  내가 그 때 펄벅의 ‘대지’를 읽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로 학업을 중단했지만, 감수성이 예민할 때 읽은 한 권의 책이 내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나는 1971년 10월부터 1973년 2월말까지 우리 집 머슴을 따라다니며 농사를 지었다. 몸은 피곤하였지만 마음은 편하였다. 이때부터 책을 사서 모으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책으로는 1971년 10월 6일에 구입한 장서번호 3번 ‘데미안’과 1971년 10월 12일에 구입한 장서번호 6번 ‘이방인’이 있다. 1972년에는 독서신문을 구독하고,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그레이트 북스 50권, 어문각에서 나온 신한국 문학전집 50권 중 10권을 구입하였다. 사마령 원작의 무협소설 검신(5권)과 검웅(5권)도 구입하여 재미있게 읽었다. 


  1973년이 되자 농사일에 싫증이 났다. 무논에서 모내기하고, 논을 매는 일, 보리와 벼를 베어 타작하고, 사과밭에서 분무기로 농약을 보내는 일, 봄이 되면 보리밭을 매는 일 등 농사일은 모두 힘드는 일 투성이였다. 멀리서 보는 농촌의 평화로운 풍경은 보는 사람의 생각일 뿐, 막상 일을 하는 사람들은 무더운 여름날에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해야 하고, 허리가 아파도 제대로 펴지도 못한다. 그런 일을 평생 동안 되풀이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앞이 캄캄하였다. 펄벅은 직접 농사를 짓지 않고 소설을 쓴 것이 분명하였다.

  아버지에게 다시 공부하겠다고 하고, 3월말부터 하양에서 자취하는 여동생과 같이 지내면서 대구에 있는 검정고시 학원에 다녔다. 7월말에 고등학교 졸업학력검정고시 전 과목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대학 입시에서는 경대 국문과와 영대 법학과에 모두 불합격하였다. 1974년을 누나집에서 지내면서 재수하여 1975년에 대구교대에 입학하였다.


  교대에 다닐 때는 법관이 되고 싶었다. 교육학은 대충 공부하고, 곽윤직이 쓴 ‘민법총칙’과 김철수가 쓴 ‘헌법학개론’을 보물처럼 가지고 다녔다. 시간이 날 때면 도서관에서 민법과 헌법을 공부하였다. 2학년 때 심화과목으로 정치ㆍ경제를 선택하고 조순이 쓴 ‘경제학 개론’을 읽었다.

  내 뜻대로 법관이 될 수 있을지 궁금하여 운명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김혁제ㆍ한중수가 쓴 ‘비전 당사주요람’부터 명리정종정해, 연해자평정해, 사주정설 등의 사주책과 성명학, 수상학, 관상학, 복무정종 등 점보는 책까지 수도 없이 구입하여 읽었으나 내 운명조차 제대로 풀이할 수 없었다.


  1977년 교대를 졸업하자마자 영남대학교 법정대학 법학과에 편입하였다. 사법시험 준비를 위해 1차 시험 8과목의 기본서 1~2권, 문제집 3권씩을 구입하여 공부하고, 고시연구를 정기 구독하였다. 그러나 1차에도 합격하지 못하였다. 

  1978년 3월 25일 경주군 서면 아화초등학교에 발령을 받았다. 내 손으로 봉급을 받으면서 제일 좋았던 것은 마음대로 책을 사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학교에 오는 책장수에게 전집을 구입하고 시간 있을 때마다 서점에 갔다. 삼성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100권)을 비롯해서 신한국문학전집(50권), 제3세대한국문학(24권), 세계사상대전집(30권), 새우리말큰사전, 일본문학대전집(10권), 한국고전문학전집(8권), 세계해학문학전집(12권) 등을 구입하고, 삼중당문고, 을유문고 등 문고본도 사서 읽었다. 인간시장(20권), 장길산(10권), 지리산(7권), 이문열 평역 삼국지(10권) 등 장편소설도 구입하였다.


  1982년에 행정고시로 전환하여 행정고시 1차 시험과목 기본서와 문제집, 2차 시험 기본서와 주관식 문제집을 사서 공부하였다. 운좋게 1차 시험은 합격하였으나 2차 시험은 2년 연속 낙방하였다. 그 후로는 행정고시 1차 시험도 되지 않았고, 국가안전기획부 특정직 시험도 최종 면접에서 불합격하였다.


  1984년에 김정빈의 선도소설 ‘단’ 이 나온 후로 단학 열풍이 불었다. 나도 신선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단전호흡과 선도 수련에 관한 책을 많이 구입하여 읽었다. 주로 정신세계사에서 나온 책들이었다. 대동이(5권), 다물, 맥이, 한단고기, 민족비전 정신수련볍, 건강기공, 붓다의 호흡과 명상, 생활참선, 선도체험기 등의 책을 읽고, 터, 인생십이진법, 신약본초 등 명당, 운명, 건강에 관한 책들도 읽었다. 


  1992년부터 2년 동안 한국교원대학교대학원 사회과교육학과에 다닐 때는 사회과교육 관련 책과 논문,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영남대학교대학원 사법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전공할 때는 가족법 관련 책과 논문을 읽었다. 그리고 2003년 교육전문직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교육학 관련 책과 문제집을 구입하여 공부하였다. 전문직이 된 후에는 교과교육학, 교육과정 관련 책과 장학자료, 연수자료 등을 읽었다.


  이사할 때마다 오래되거나 필요 없다고 생각되는 책을 버렸지만, 아직도 이삿짐 중에서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것은 책이다. 지금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은 대부분 읽지 않은 책이다. ‘퇴직하면 읽어야지’ 하고 생각하지만, 그 때는 눈이 어두워져서 지금보다 더 읽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책장 가득 들어 차 있는 책들을 보면 마음이 흐뭇하다. 


  나의 독서 이력을 돌이켜 보면 뚜렷한 목표 없이 책을 읽었다는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나 중학교 때 읽은 만화와 동화, 소설은 그렇다 치더라고, 대학입학 후에도 교육학과 법학을 번갈아가며 공부하면서, 운명학, 단학 등 이것저것 마구 읽었다. 그야말로 책의 숲에서 길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어 다닌 꼴이다. 그래도 내가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고, 내가 읽고 싶었던 책을 읽을 수 있어서 행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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