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그림책 작가 존 버닝햄 별세
날마다 학교에 지각하는 존에게도 이유는 있었다. 등굣길 악어가 나타나 책가방을 물고, 사자가 바지를 뜯고, 강이 파도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내 살다 살다 별소리를 다 듣는다”며 고함을 지르고 회초리를 들지만, 이를 벌주기라도 하듯 고릴라가 나타나 선생님을 천장에 매단다, 그림책 ‘지각대장 존’(1987)은 이 장면 하나로 전 세계 아이들에게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안기는 동시에 훈육 위주의 교육에 일침을 가하며 아동 문학계의 총아가 됐다.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덜 지적인 것은 아니다. 경험이 부족할 뿐”이란 신념으로 평생 참신한 ‘문제작’들을 발표해온 영국 그림책 거장 존 버닝햄(82)이 2019년 1월 4일(현지 시각) 런던에서 폐렴으로 별세했다. 마를 줄 모르는 창작의 샘에서 60년 가까이 현실과 상상을 오가는 그림책 60여 권을 낸 그는 1963년 데뷔작 ‘깃털 없는 기러기, 보르카’로 영국의 권위 있는 케이트 그린어웨이상을 받았고, 1970년 ‘검피 아저씨의 뱃놀이’로 같은 상을 또 거머쥐며 이름을 알렸다. ‘지각대장 존’은 국내에서만 50만부, 다른 대표작들까지 합쳐 모두 100만부 넘게 팔리며 그림책의 전성기를 열었다.
시간을 잘 지키는 아이였지만 혼자만의 세계에 곧잘 빠졌던 그는 학교도 열 군데 이상 옮겨 다니다 대안학교인 서머힐 스쿨에 겨우 안착한 괴짜였다. 10대 후반엔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프렌즈 앰뷸런스 유닛’이란 단체에 들어가 2년 6개월 동안 타국을 떠돌며 막노동을 했다. “그때 만난 사람들, 들었던 이야기가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고 훗날 작품의 밑천이 됐다”고 했다.
기존 질서와 통념에 저항하는 기질이 작품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주인공들은 죄다 소심하고 냉소적이다.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교사에게 심드렁한 존은 물론이고, ‘알도’는 늘 혼자인 소녀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한 수작이다. 못생기고 뚱뚱해 버림받은 개 심프가 서커스 단원으로 성공하는 과정을 그린 ‘대포알 심프’도 있다. 강물에서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동물들과 아이들이 노을 지는 들판을 지나 집으로 돌아오는 ‘검피 아저씨의 뱃놀이’는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20여 장의 그림과 시처럼 절제된 문장들로 성장과 소통, 이별과 죽음, 환경오염까지 다루는 그의 그림책은 “어른이 좋아하는 것과 아이가 좋아하는 것들은 생각만큼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서 기인했다. 2003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특별히 아이들만을 염두에 두고 작업하진 않는다”며 “어느 한 가지 재료에 구속받으면 상상력이 무너진다”고 했다.
‘어린애들이나 보는 시시한 만화’ 정도로 평가절하되던 그림책을 예술의 경지에 올려놨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을 좋아해 2000년대 중반 두 차례나 내한했고, 자신의 그림책 인생 40년을 기념하는 전시도 고향 런던이 아닌 서울에서 열었다. 한국 엄마들에겐 “아이들에게 혼자 놀 시간을 보장해줘야 동심을 오래 간직할 수 있다”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시력 좋고, 손도 떨지 않으니 얼마나 큰 축복이냐”며 지난해까지 활발한 활동을 펼친 그는 “내 정신연령은 다섯 살에 머물러 있다”며 늘 아이 같기를 소망한 피터팬이었다. (김경은 기자, ’어린애나 보던‘ 그림책, 예술의 경지로 올린 거장, 2019.1.9.(수), 조선일보 A2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