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 리뷰

세상의 모든 시간

kdy820 2020. 6. 22. 10:14

 

 

 

느리게 사는 지혜에 관한 인문교양서이다. 지은이 토마스 기르스트(Thomas Girst)는 함부르크대학교와 뉴욕대학교에서 미술사와 미국학 및 현대 독일문학을 공부했으며, '미술, 문학, 일본-미국 간 억류'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3년부터 BMW 그룹의 국제문화 분야를 담당하고 있으며, 뮌헨예술원 명예교수를 맡고 있다. 옮긴이 이덕일은 동아대학교 철학과와 인도 뿌나대학교 인도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독일어 과정을 수료했으며, 현재 바른 번역 소속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이 책에는 28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다. 흥미 있게 읽은 6편의 에세이를 소개한다.

 

1. 우편배달부 슈발

10,000일, 93,000시간, 33년 노고의 세월. 외벽에 이런 문구를 새기고 나서 시골의 우편배달부였던 페르디낭 슈발(Ferdinand Cheval)은 '꿈의 궁전(Palais Idéal)을 짓는 일에 마침표를 찍기로 결심했다.

 

슈발은 프랑스 동남부의 갈로흐(Galaure)강변에 위치한 오트리브(Hauterives) 마을에 살았다. 그는 1879년부터 1912년까지 우편배달을 하며 주워 온 돌멩이와 자갈, 조개로 한때 밭으로 쓰던 땅 위에 거대하고 유려한 '꿈의 궁전'을 세웠다.

 

걸어서 내부를 통과할 수 있는 꿈의 궁전은 가로 30미터, 세로 15미터 크기이며, 높이는 13미터에 이른다. 빽빽하게 장식된 복잡한 정면에는 수백 개의 동물 조각상과 화초와 채소, 신화 속의 형상, 역사 속 혹은 동시대 인물들, 거인을 포함한 수많은 생명의 형태가 묘사되어 있다. 오늘날 꿈의 궁전은 매년 1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우편배달부 슈발이 직접 지은 꿈의 궁전

2. 타임 캡슐

디지털 저장에 대해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1974년부터 1987년에 자신이 사망할 때까지 수십만 개의 문서와 물건을 TC 1에서 TC 610까지 분류해 600개가 넘는 판지 상자에 보관해 놓았다. TC라는 글자는 다름 아닌 타임캡슐(Time Capsule)의 약자였고, 그 주인은 바로 앤디 워홀(Andy Warhol)이었다.

 

그 상자에는 발톱과 음식물 찌꺼기, 팬레터, 영화배우 클라크 게이블의 구두, 사용한 콘돔, 아동 도서와 벨트 버클, 사진 부스에서 찍은 사진, 포르노, 우편 광고물, 사탕 포장지, 전단, 문구류, 심지어는 인스턴트 수프 캔까지 들어 있었다.

 

2014년에 한 익명의 입찰자가 앤디 워홀이 남긴 마지막 타임 캡슐을 여는 특권을 부여받기 위해 약 3만 달러(약 3,550만 원)를 지불한 것을 보았다면 앤디 워홀은 무척 기뻐했을 테다. 결국 그의 말대로 ‘훌륭한 사업이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예술이다.’

 

나는 몇 년 전에 ‘앤디 워홀의 일기’를 읽다가 그만두었다. 일기는 1976년 11월 24일 수요일에 처음 시작되고 1987년 2월 17일 화요일에 끝난다. 앤디 워홀은 1987년 2월 22일 일요일에 사망했다. 죽기 5일 전까지 일기를 썼다. 일기를 보면 앤디 워홀의 편집증에 가까운 성격을 알 수 있다. 택시를 탔을 때는 택시비($15)와 팁($5)을 나누어서 적고, 승용차를 탔을 때는 휘발유 가격($19.97), 통행료($3.40)를 빠짐없이 적는다. 그가 알고 지내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 잘 알 수 있다. 일기를 쓰기 2년 전부터 타임캡슐에 들어갈 물건을 모았는데, 그 속에 들어간 물건들의 목록을 보고 나는 과연 앤디 워홀 답다는 생각을 했다.

 

팻 해켓 엮음/홍예빈 역, 앤디 워홀 일기, 미메시스, 942쪽, 21cmX24cm, 2009.

 

3. 할버슈타트의 존 케이지

독일 할버슈타트(Halberstadt)에 위치한 부르하르디(Burchardi) 교회에서는 존 케이지(John Cage)가 작곡한 오르간 음악곡 '오르간2/ASLSP(가능한 느리게, As SLow aS Possible)가 연주되고 있다. 1987년에 무작위적 음조로 편집된 이 오르간 음악이 할버슈타트에서 공연되는 기간은 무려 639년에 달한다. ASLSP 연주에 대한 케이지의 지시는 음악 제목과 같이 ‘가능한 한 느리게’다.

 

2001년부터는 교회의 텅 빈 신도석에 들어서는 사람은 누구나 영구적인 화음 속에서 모든 것을 감싸는 듯한 진동과 흔들림에 둘러싸이게 됐다. ASLSP 오르간의 건반 위에는 모래주머니가 매달려 있고 밸브는 열려 있으며, 조용한 압축기가 오르간 파이프를 위해 공기를 빨아들인다.

 

다음 음이 바뀌는 때는 2020년 9월이다. 교회 오르간 소리는 멀리까지 울려 퍼지고 있어서 정확히 어디에서 소리가 비롯되는지 구별하기 어렵다. 눈을 감거나 눈을 한곳에 고정시키고 소리 속에 자신을 맡기면 무중력 속에서 세상과 분리된 듯한 느낌이 든다. 소리가 영원의 문을 여는 것이다. 밤중에 플렉시글라스로 된 오르간 뚜껑이 오르간 위로 미끄러진 듯 끊임없이 계속되는 소리. 이웃들은 누군가 차의 경적을 누른 채 잠든 것 같다며 불평하기도 했다.

 

'Organ2/ASLSP'가 연주되고 있는 오르간

4. 천년의 난제

서기 2000년 클레이 수학연구소(Clay Mathematics Institute)는 새천년의 난제 7문제 중 하나를 해결하는 이들에게 100만 달러(약 11억 6천만 원)의 상금을 주기로 약속했다. 2002년 난제를 지정한 지 불과 2년 만에 러시아의 수학자 그리고리 야코블레비치 페렐만(Grigori Yakovlevich Perelman)이 일반인들도 접근 가능한 공개 접속 서비스에 1904년의 앙리 푸앵카레(Henri Poincaré) 추론에 대한 첫 번째 증거를 39페이지에 걸쳐 업로드함으로써 난제 하나가 해결되었다. 여기서 페렐만은 3차원 공간의 형태에 대한 푸앵카레의 고찰을 과학적으로 증명해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의 작은 고층아파트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은둔 생활을 하고 있는 페렐만은 언론과의 인터뷰도 거절하고 클레이 수학 연구소의 100만 달러 상금을 거부했다. 2006년에는 이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국제적 상이자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여겨지는, 뛰어난 수학적 발견을 한 학자에게 주는 필즈 메달(Fields Medal)도 거절했다.

 

1966년생인 페렐만은 오페라 애호가이자 버섯 수집가다. 그는 산책을 매우 즐기며 세상 사람들의 호들갑과 주목을 일부러 피해서 살아간다. 그에게는 세상의 어떤 대가도 의미가 없으며, 돈도 명예도 전혀 안중에 없다. 이례적으로 한 언론과 가졌던 인터뷰에서, 그는 증명의 정확성이야말로 그가 몰두하는 연구 작업의 유일한 기준이며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유일한 긍정성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5. 서두름의 시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는 인생의 마지막 13년 동안 침대에서 구부린 무릎을 책상 삼아 글을 썼다. 이 책이 세기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다. 1871년에 태어난 그는 1906년부터 볼르바르 오스만가의 한 아파트에서 살았고, 1909년부터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오로지 이 작품을 위해서만 살았다. 1914년부터 죽기 몇 달 전, 마지막 원고에 끝이라는 단어를 적었던 1922년까지 그는 파리와 자신의 침대를 떠나는 법이 없었다.

 

총7권으로 이루어져 있고 수백 명의 등장인물이 나오는, 5천 쪽이 넘는 이 방대한 소설은 프루스트의 대표작이다. 이 책 제1권의 1장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은 그의 어머니가 내주곤 했던, 보리수 꽃차에 마들렌을 적셔서 먹던 기억을 다섯 페이지에 걸쳐 묘사하는데, 이 행복한 기억의 문을 열어젖힘으로써 주인공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된다.

 

작가 알랭드 보통(Alain de Botton)은 그의 책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에서 프루스트의 작품으로부터 삶의 지혜를 이끌어 낸다. 이 책은 한 장 전체를 ‘시간을 어떻게 천천히 보낼 것인가’라는 주제에 할애했다. 보통은 이 장에서 독서의 장애물이라고 할 수 있는 ‘프루스트 문장의 엄청난 길이’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그 문장을 구성하는 단어들을 한데 붙이면 ‘아마 거의 4미터 길이’가 될 것이며 ‘와인 병의 중간 부분을 17번 정도 감을 수 있는 길이’가 될 것이다.

 

프루스트를 읽는 것은 지식과 계시를 동시에 얻는 일이기도 하다. 바흐처럼 프루스트는 신의 증거 역할을 한다. 작가 요헨 슈미트(Jochen Schmidt)는 600쪽 분량의 자기 실험서 ‘슈미트가 프루스트를 읽다’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책이 너무 길어서가 아니라 읽으려면 영혼을 악기처럼 조율해야 하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걸 평생 자랑스러운 업적으로 삼을 만하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처럼 프루스트의 풍부한 경험에는 인간이 지금까지 생각해 왔고, 생각하고, 앞으로 생각할 모든 것이 담겨 있다. 한 사람이 이룰 수 있는 일에 대해 프루스트의 예를 생각해 보면 나 자신부터 겸손해진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면 당신도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유혹에 시달릴 것이다.

 

나는 한때 700쪽 이상 되는 두꺼운 책들만 모아서 ‘벽돌책도서관’을 만들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수집대상 도서였다. 동서문화사 월드북 140~142권까지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 3권이다. 1권에는 목차 다음에 1~7편까지의 등장인물 113명을 19쪽에 걸쳐 소개하고, 전7편 줄거리를 10쪽에 걸쳐 소개한다. 본문이 시작되면 그림 한 점없는 빽빽한 글 숲에서 글의 의미를 찾으며 헤매게 된다. 제1편 ‘스완의 집 쪽으로’ 제1부 ‘콩브레’도 다 읽지 못하였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 읽은 사람은 만난다면 ‘정말 존경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마르셀 프루스트/민희식 옮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동서문화사, 1049쪽, 16cmX23cm, 2012.

 

6. 눈 위의 흔적

1956년 12월 25일 오후, 한 남자가 눈 속에 파묻혀 죽음을 맞이했다. 이웃 농장의 두 아이가 그를 발견했다. 3561번 환자는 그날 오후 스의스의 아펜첼에 있는 헤리자우 요양원의 1호실을 나왔다. 그는 거의 30년의 세월을 정신과 병원에서 보냈다. 바흐테네그산을 올라 알프스와 콘스탄스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두 개의 작은 숲 사이에 있는, 상당히 가파른 개간지의 오르막길이 끝난 지점에서 78년을 살아온 그의 심장이 멎었다. 눈 속에서 죽은 그 사람은 20세기에 독일어로 쓰인 가장 매혹적인 글을 쓴 작가 로베르트 발저(Robert Walser)였다.

 

발저가 글을 쓴 곳은 종이 쪼가리부터 영수증, 업무용 서류와 신문지의 여백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이는 모두 1920년대 중반부터 10년 후 그가 마지막으로 절필할 때까지 쓴 글들로 발저의 서적 발행인이었던 칼 젤리그(Carl Seelig)에 따르면 “스스로 발명한 것처럼 보이는, 해독할 수 없는 손 글씨”로 쓰여 있었다, 아주 작게 쓴 글씨는 높이가 점점 줄어들어서 끝에 가면 글씨의 키가 1밀리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그 글씨들은 발저의 세상에 대한 거부 혹은 내면적 이민과도 같았다.

 

‘연필 구역’이라 이름 붙인 공간에 써내려 간 그의 마이크로그람(Mikrogramme: 극도의 작은 발저의 글씨를 일컫는 표현)은 해독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발저는 극도로 줄여서 쓴 독일어 필기체로 자신이 본 것과 느낀 것을 묘사하고 구술하였으며 수많은 시와 에세이, 관찰기를 남겼다.

 

발저가 세상을 떠난 지 거의 반세기가 지난 후 문학 연구가들이 초경량 저작이라고 부른 그의 글들은 문학 학자인 베른하르트 에히테(Bernhard Echte)와 베르너 몰랑(Werner Morlang)의 거의 20년에 걸친 해독 작업을 거쳐 여섯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그리하여 깨알 같은 글씨로 적힌 526장의 글이 시시포스의 고역과도 같은 편집 작업을 거쳐 처음으로 약 4,500쪽에 달하는, 완전히 해독 가능한 글로 재탄생했다.

 

1986년부터 스위스 최초의 문학 하이킹 루트로 헤리자우에 총 길이 7킬로미터가 넘는 로베르트 발저의 길이 조성되었다. 이 길의 곳곳에는 발저의 인용문이 새겨져 있다. 또한 이 순환 경로는 로젠발트를 거쳐 발저가 영원한 휴식에 빠졌던 빈터로 이어진다. 그러나 눈 속에서 얼어 죽은 그의 삶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그가 죽은 위치를 정확히 표시하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걷다 보면 아무 눈치도 채지 못한 채 그곳을 지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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