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David Forster Wallace)는 1962년 뉴욕에서 태어나 2008년 46세로 사망한 미국의 소설가이다. 대학에서 철학과 영문학을 전공했고 졸업논문으로 쓴 장편소설 ‘시스템의 빗자루’(The Broom of the System)가 1987년 단행본으로 출간되면서 소설가로 데뷔했다. 옮긴이 이다희는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교에서 철학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서양고전학을 공부했다.
이 책에는 월리스의 산문집 세 권에서 골라 엮은 다섯 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다.
1.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7~105쪽)
월리스의 고향 일리노이주에서 열리는 촌스러운 주 축제에 대한 취재기로 1994년 ‘하퍼스’에 ‘축제로 가는 티켓’이라는 제목으로 실렸으며, 그의 첫 번째 산문집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에 수록되었다. 1993년 8월 5일부터 8월 15일까지 열하루에 걸쳐 날짜 순, 시간 순으로 기록한 르포 에세이다.
“8월 5일 9시 5분. 기자 출입증을 발급하는 사람은 밋밋하고 창백한 얼굴에 콧수염이 있으며 반팔 니트 셔츠를 입고 있다. 내 앞에 줄을 선 기자들은 ‘오늘의 농업’(Today’s Agriculture), ‘디케이터 해럴드 앤드 리뷰’(Dacatur Herald & Review), ‘일리노이 수공예 뉴스레터’(Illinois Crafts Newsletter), ‘4-H 뉴스’(4-H News), ‘주간 축산업’(Livestock Weekly) 등에서 왔다. 기자 출입증은 단지 증명사진을 코팅한 것으로 주머니에 달 수 있게 악어 입 모양의 작은 집게가 달려 있다. 주변에 페도라를 쓴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내 뒤로는 지역 원예 잡지에서 나온 나이 든 여성 둘이 있는데 나를 업무와 관련된 대화에 끌어들인다. 한 사람은 일리노이주 축제의 비공식 역사 전문가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요양원이나 로타리클럽 점심 모임에 가서 축제에 대한 슬라이드를 보여주며 설명한다고 한다. 그리고 아주 빠른 속도로 역사적 정보를 나열하기 시작한다. 축제는 1853년 시작됐고 남북전쟁 중에도 매년 열렸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1893년에도 어떤 이유에선지 열리지 않았다. 개막일에 주지사가 리본을 자르지 않은 해는 단 두 해밖에 없었다. 기타 등등. 문득 메모장을 가져왔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이 든다.”(12~13쪽)
“8월 13일 10시 40분. 가축 행사장에 가축은 만원이지만 개막식이 끝나자마자 가축을 구경하러 온 축제 관람객은 우리(월리스와 월리스의 토박이 친구(여자))뿐인 듯하다. 이제는 어떤 축사에 어떤 동물이 있는지 눈을 감고도 알 수 있다. 말들은 각각 저마다의 칸막이 안에 들어 있고 칸막이에는 높이가 보통의 절반인 문이 달려 있다. 말의 주인과 관리인들은 문 옆에 있는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있고 졸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 말들은 건초 위에 서 있다. 어느 젊은 관리인이 틀어놓은 듯한 밀리 레이 사이러스의 노래가 크게 울려 퍼진다. 말들은 가죽이 팽팽하고 사과만 한 눈이 물고기처럼 머리 양옆에 달려 있다. 나는 훌륭한 가축 옆에 이렇게 가까이 와본 적이 없다. 말들의 얼굴은 길고 왠지 관을 연상시킨다. 경주용 말은 호리호리한 것이 뼈대 위에 벨벳을 입힌 느낌이다. 짐수레용 말이나 전시용 말은 거대하고 털이 티끌 하나 없이 잘 다듬어져 있으며 냄새가 없다시피 하다. 다만 코를 찌르는 듯한 냄새는 말의 소변 냄새다. 모든 근육이 아름답다. 가죽은 근육을 더 돋보이게 한다. 꼬리는 이중 관절인 듯 우아하게 흔들리고 파리가 어떤 협공도 할 수 없도록 막는다. (말파리라는 것이 정말로 있다.) 말들은 키 작은 문 위로 머리를 내놓고 한숨을 쉴 때 하나같이 방귀를 뀌는 듯한 소리를 낸다. 하지만 말을 만질 수는 없다. 가까이 가면 귀를 납작하게 접고 커다란 이를 드러낸다. 우리가 깜짝 놀라 물러서자 관리인들이 소리 내어 웃는다. 이 말들은 대회를 위한 특별한 말들이고 정교한 교배로 태어났으며 예민한 예술적 기질을 갖고 있다. 당근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다. 동물의 마음은 매수할 수 있는 법이다. 말들은 칸칸이 끝도 없이 들어차 있다. 말들의 색깔은 규정에서 벗어나지 않는 일반적인 색깔이다. 말들은 밟고 선 건초를 먹기도 한다. 이따금 보이는 사료 주머니는 방독면처럼 생겼다. 갑자기 누군가 호스로 물을 뿌리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들려서 보니 번지르르한 초콜릿색 수컷이 오줌을 누고 있다. 녀석은 칸막이 사이에서 문이 열린 채로 빗질을 받고 있고 우리는 녀석이 오줌누는 모습을 지켜본다. 오줌발은 직경이 2~3센티미터는 족히 되고 바닥에 있던 먼지와 건초, 작은 나무조각 등을 튀어 오르게 만든다. 우리는 웅크리고 앉아 위를 올려다본다. 순간 나는 특정한 인간 남성을 수식하는 특정 표현들을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들어보기는 했지만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표현을 몸을 낮추고 공포와 경외심이 섞인 시선을 위로 향한 지금에야 제대로 깨닫게 된 것이다."(26~27쪽)
2. 데이비드 린치, 정신머리를 유지하다(107~210쪽)
미국 영화감독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로스트 하이웨이’ 촬영장을 방문한 뒤 쓴 기사이다. 데이비드 린치의 거의 모든 작품과 감독 자신에 대한 깊이 있는 설명과 분석, 동경과 칭송이 담겨 있다. 1996년 ‘프리미어’에 실렸으며, 첫 번째 산문집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에 수록되었다.
“내가 영화 촬영장에 나와 있는 데이비드 린치의 실물을 처음 보았을 때 린치는 나무에 소변을 보고 있었다. 농담이 아니다. 1월 9일, 웨스트 로스앤젤레스의 그리피스 파크에서였다. 이 곳에서는 ‘로스트 하이웨이’의 실외 및 운전 장면이 촬영되고 있었다. 린치는 베이스캠프 트레일러와 촬영 세트 사이에 있는 흙길 가장자리 촘촘한 덤불 사이에 서서 발육이 멈춘 소나무에 오줌을 누고 있었다. 막대한 양의 커피를 마시는 데이비드 린치는 힘차게, 그리고 자주 소변을 누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소변이 마려울 때마다 트레일러가 줄지어 선 베이스캠프로 가서 화장실 트레일러를 사용하기에는 그도 시간이 없고 제작 일정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본 린치의 첫 모습은 먼발치에서(당연히) 본 뒷모습이었다. ‘로스트 하이웨이’의 배우와 제작진은 린치의 노상 방뇨를 그냥 무시하고 넘어간다. 긴장되고 불편한 상태가 아닌 편안한 태도로 무시한다. 야외에서 소변을 누는 아이를 무시하듯 하는 것이다.”(111쪽)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중 내가 본 것은 '이레이저 헤드'와 '블루 벨벳'이다. 이레이저 헤드는 두 달 전에 DVD로 보았는데, 주인공의 머리로 지우개를 만드는 등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의 연속이었다. 블루 벨벳은 너무 오래 전에 본 영화여서 줄거리도 생각이 나지 않고 영화 장면에 대한 기억도 없다. 월리스는 블루 벨벳에 대하여 가장 많은 지면을 쓰고 있다. 블루 벨벳을 한 번 더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 대한 월리스의 지식과 평가가 영화 평론가 못지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3. 무엇의 종말인지 좀 더 생각해봐야겠지만 종말인 것만은 분명한(211~224쪽)
존 업다이크의 ‘시간의 종말을 향하여’에 대한 서평으로 1997년 ‘뉴욕 업저버’에 실렸고 산문집 ‘랍스터를 생각해봐’에 수록되었다.
“노먼 메일러, 존 업다이크, 필립 로스를 비롯해 전후 미국 픽션계를 지배했던 위대한 남성 나르시시스트들은 이제 노년에 들어서고 있으며, 그들의 예정된 죽음 뒤로 다가오는 새로운 세기 그리고 명명백백한 소설의 죽음에 대한 온라인상의 예측이 역광처럼 비추고 있음은 그들에게 필연처럼 느껴질 것이다. 어찌 됐든 유아론자(solipsist)가 죽으면 모든 것이 그와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아론자의 내부 지형도를 존 업다이크만큼 잘 그려낸 미국 소설가도 없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떠오른 업다이크는 루이 14세 이후 가장 자아도취적인 세대의 사관이자 목소리로 자리 잡았다.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업다이크가 가장 몰두했던 주제는 늘 죽음과 섹스였다. (꼭 이 순서대로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업다이크 작품의 분위기가 근래에 좀 더 냉랭해진 것은 이해할 만하다. 업다이크는 언제나 주로 자신에 대해 써왔고 의외로 감동적이었던 ‘토끼, 휴식을 취하다’(Rabbit at Rest) 이후 점점 더 노골적으로 자신의 죽음이라는 종말의 가능성을 탐구해왔다. ‘시간의 종말을 향하여’(Toward the End of Time)는 매우 학구적이고 성공적이며 나르시시스트이고 섹스에 집착하는 한 은퇴 남성에 관한 이야기로 이 남성은 1년에 걸쳐 일기를 쓰며 자신의 죽음이라는 종말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또한 ‘시간의 종말을 향하여’는 내가 읽은 스무 권 넘는 업다이크 책 가운데 그야말로 최악이다. 얼마나 투박하고 제멋대로인지 작가가 이 상태로 출간되도록 내버려두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213~214쪽)
나는 업다이크의 작품을 한 편도 읽지 못했다. 내가 가진 세계문학전집 가운데 ‘달려라 토끼’가 있지만 읽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시간의 종말에 관하여’는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았다. 월리스의 서평을 통해 존 업다이크의 작품 세계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시간이 나는 대로 ‘달려라 토끼’부터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4. 수사학과 수학 멜로드라마(225~257쪽)
정수론을 주제로 하고 있는 두 권의 장르 소설(‘천재와 광기’, ‘그가 미친 단 하나의 문제, 골드바흐의 추측’)에 대한 서평으로 월리스가 자신의 고등수학 지식을 마음껏 뽐내는 글이다. 2000년 ‘사이언스’에 실렸으며 산문집 ‘육체이면서도 그것만은 아닌’에 수록되어 있다.
“픽션이기는 하지만 필리베르트 스호흐트의 ‘천재와 광기’(The Wild Numbers)와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의 ‘그가 미친 단 하나의 문제, 골드바흐의 추측’(Uncle Petros & Golabach’s Conjecture)은 모두 악젤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그리고 고드프리 헤럴드 하디의 ‘어느 수학자의 변명’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두 소설 간에는 기타 매우 놀라운 유사점들이 있다. 두 소설 모두 수학 학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등장 인물의 전문 분야가 고등수학에서 가장 순수하게 추상적인 분야인 ‘정수론’이다. 이 두 소설 모두 정수론의 유명하고 오래된 문제들을 풀고자 하는 주인공의 원정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천재와 광기’와 ‘그가 미친 단 하나의 문제, 골드바흐의 추측’ 모두 영어가 아닌 언어로 쓰였지만 원저자가 직접 영어로 번역했다. 두 소설이 매우 닮았다는 사실, 미국에서 거의 동시에 출간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미국 내 출판사들에서 이 두 소설을 열렬히 홍보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두 완전히 새로운 상업 장르, 즉 이른바 ‘수학 멜로드라마’(Math Melodrama) 장르의 태동을 알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진전은 전혀 놀라울 이유가 없다. 위에서 언급한 여러 작품도 성공했을뿐더러 근래에는 새로운 기술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기타 장르도 상업적인 성공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뉴로맨서’류의 사이버펑크 장르, 톰 클랜시 풍의 테크노스릴러 장르, ‘스니커즈’, ‘해커스’, ‘매트릭스’처럼 젊고 당돌한 해커들이 사악하고 획일화된 제도를 무너뜨리는 영화 등이 그 예다.)"(228~229쪽)
나는 수학을 못한다. 공통수학 앞 부분을 공부하고 고졸학력검정고시에 합격하였다. 수학은 40점으로 과락을 겨우 면했다. 그래서 수학 잘하는 사람을 제일 부러워한다. 월리스가 두 권의 소설을 비교하면서 책 속에 나오는 수학 난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앞으로 수학 소설은 읽지 않기로 하였다. 이해할 수 없는 책을 읽으려고 시간을 보내는 것 보다 아예 읽지 않는 편이 낫다.
5. 결정자가 된다는 것: 2007년 미국 최고 에세이 특별 보고서(259~281쪽)
‘2007년 미국 최고 에세이’ 선집의 객원 편집자로서 쓴 서문으로, 좋은 에세이란 무엇인지 묻는 데서 시작해 더 심오한 시대적 문제까지 건드린다. 산문집 ‘육체이면서도 그것만은 아닌’에 수록되었다.
“이 글들이 나에게 가장 큰 가치가 있는 이유는 특별한 정직성을 가지고 사실을 다루기 때문이다. (……) 2007년 미국 최고 에세이 선정작을 고를 때 노골적으로 그리고 편파적으로 선호한 에세이는 바로 반사적인 도그마를 약화시키는, 성실하고 전폭적으로 스스로 ‘결정자’가 되려고 시도하는 작품들이다.”(279쪽)
토마스 기르스트(Thomas Girst)는 ‘세상의 모든 시간’에서 ‘찰스 디킨스, 제인 오스틴, 마크 트웨인 또는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또는 니콜라이 고골, 이들 모두는 죽거나 자신과의 끊임없는 싸움에 시달리느라 미완성의 책을 남겼다’(216쪽)라고 썼다. 월리스가 마크 트웨인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유명한 작가라는 뜻이다. 2011년 출간된 월리스의 세 번째 소설 ‘창백한 왕’(The Pale King)은 월리스가 죽기 전까지 십여 년간 집필한 미완성 유작이다. 그는 죽기 마지막 날까지 원고를 정리하고 유서를 썼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월리스를 처음 알았다. 그전에는 이름도 알지 못했다. 글의 종류가 에세이인데도 소설 못지않게 흥미진진하였다. 월리스가 글을 정말 재미있게 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월리스의 두 번째 장편소설 ‘무한한 재미’(Infinite Jest)는 1,0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라고 하며, 20세기 말 미국 문학을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문제작이라고 한다. ‘타임’은 이 소설을 ‘20세기 100대 걸작 영어 소설’ 중 하나로 선정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번역본이 나오면 꼭 읽어야겠다.
'장서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쩌다 보니 재즈를 듣게 되었습니다 (0) | 2020.06.22 |
---|---|
둘이서 걸었네 (0) | 2020.06.22 |
세상의 모든 시간 (0) | 2020.06.22 |
노모포비아 스마트폰이 없는 공포 (0) | 2020.06.12 |
천년의 수업 (0) | 2020.06.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