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을 함께 산 노부부의 해파랑길 도보 일기이다. 저자인 송언은 춘천교육대학교와 성균관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8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고,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하면서 동화 작가가 되었다. 교직에서 명예 퇴임 후 전국의 도서관과 초등학교를 누비면서 아이들과 직접 만나고 있다.
이 책은 1부: 울산에서 울진까지, 2부: 울진에서 삼척까지, 3부: 삼척에서 고성까지, 4부: 부산에서 통일전망대까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 3부까지는 도보 여행 일기이고, 4부는 도보 및 자동차 여행 일기이다.
도보 및 자동차 여행은 길게는 8일, 짧게는 3일 정도의 기간 동안 이루어진다. 1부의 도보 여행은 2015년 12월 24일에 시작하여 2015년 12월 31일까지 8일간, 2부는 2016년 2월 25일에 시작하여 2월 28일까지 4일간, 3부는 2016년 3월 26일부터 3월 31일까지 6일간, 4부의 도보 여행은 2016년 4월 13일부터 4월 16일, 4월 29일부터 30일, 자동차 여행은 6월 4일부터 6월 6일까지(도보 여행 6일, 자동차 여행 3일)이다.
이렇게 며칠씩 끊어서 여행하는 이유는 저자는 초등학교 등에서 ‘작가와의 만남’ 강연을 나가고, '저자의 그녀'는 구청의 문화원이나 여성 회관에서 ‘내 옷은 내가 만들어 입기’ 강좌를 나가기 때문이다. 퇴직 후에도 강연을 하고, 시간을 내어 부부가 함께 도보 여행을 떠나는 저자의 생활이 무척 부러웠다.
여행 일정을 보면 대개 아침 9시에 도보 여행을 시작하여 일정한 거리를 걷고 난 뒤에 점심을 먹고, 다시 걷기 시작하여 오후 5시~7시경에 저녁 식사를 하고 숙소에서 잠을 잔다. 아침 식사는 하지 않고, 점심과 저녁은 대개 식당에서 먹는다. 점심시간에 저자는 반주로 소주 1병을 마시고, 저녁 식사 때는 부부가 함께 소주 2~3병을 마신다. 부부가 같이 술을 좋아하여 무척 잘 어울리는 부부라고 생각했다.
여행이 항상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예상치 못한 돌발사태를 해결하는 것은 주로 ‘저자의 그녀’다. “동해의 작은 바닷가 마을 나아리에 이르니 월성 원자력 발전소가 해파랑길을 가로막는다. 해파랑길을 따라 올라가면 문무 대왕릉이 있는 바닷가에 곧바로 닿을 텐데 원자력 발전소가 길을 막으니 내륙 쪽으로 휘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31번 지방 도로를 따라 걷는데 봉길 터널이 나그네의 앞길을 또 가로막는다. 봉길 터널 앞 버스 정류장에는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봉길 터널은 장대 터널로서 도보는 매우 위험하오니 이곳에서 버스를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봉길 터널 관리소 054)775-0347’ 터널 길이가 자그마치 2.5킬로미터에 달한다니, 걸어서 통과하려면 40분쯤 소요되는 긴 터널이었다. 걸어서 터널을 통과하려고 작정해도 자동차가 내뿜는 매연을 고스란히 받아 마셔야 하니, 세상에 그런 고역이 또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버스 정류장 간이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렸다. 길 건너편으로는 버스가 자주 지나가는 것 같은데 우리 쪽으로는 당최 오지를 않는다. 나의 그녀가 참지 못하고 봉길 터널 관리소로 전화를 넣었다. 도보 여행하는 사람인데 한참을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는다고 하소연하자, 1시간에 겨우 한 대가 지나간다면서, 잠시 기다리면 도와주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뒤 터널 반대편에 있는 관리소에서 작은 트럭이 건너와 우리 앞에 멈추었다. 3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사내가 차에 타라고 손짓했다. 우리는 트럭 앞자리에 올라탔다. 터널을 통과할 때 내가 물었다. ‘봉길 터널을 걸어서 통과하려면 아무래도 위험이 따를 것 같습니다.’ 관리소 사내가 대답했다. ‘위험하지요. 터널 관리소에 전화하시길 잘했습니다. 1킬로미터 이상 되는 터널에는 반드시 관리소를 설치하게 되어 있거든요.’ 순식간에 터널을 통과한 트럭이 길가에 우리를 내려 주었다.”(28~29쪽)
저자는 여행 도중에 들른 정자에 쓰인 시, 지명에 얽힌 전설도 소개하고 있다. 울산 우가산 아래 우가항 안내판에 적힌 우가항의 슬픈 전설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망이라는 처녀가 밖에 나가 놀다가 집에 돌아오니 어미 소가 보이지 않았다. 어미 소의 목에 매달려 있던 워낭만 부뚜막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어미 소는 어디 갔느냐고 묻자 망이 아버지는 거짓말을 했다. 바다로 풀 뜯으러 갔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아버지는 어미 소를 우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망이는 송아지를 데리고 언덕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어미 소를 기다렸다. 하지만 기다려도 기다려도 어미 소는 돌아오지 않았다. 동네 처녀들과 어울려 노느라 소를 돌보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라 생각하고 망이는 바다 앞을 떠나지 않았다. 햇살이 좋은 오후의 바다는 짙푸른 풀밭 같았다. 어느 날 망이가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어미 소가 바다에서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망이는 정신없이 어미 소에게 달려갔다. 어미 소의 목에 워낭을 달아 주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뒤 바다로 간 망이도 어미소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19~20쪽)
묵호항에 도착했을 때는 저자가 35년 전 소설 속에서 묘사한 묵호를 떠올린다. “버스를 탔다. 비포장도로엔 먼지가 날리고 나는 버스로 망상에서 묵호까지 갔다. 묵호 부근엔 탄광이 있고 얼마간 석탄가루가 날렸다. 묵호에서 받은 첫인상은 대체로 어둡다는 것이었다. 어둡다는 말은 끈끈한 생들이 그 밑바닥에 깔려 있다는 의미를 내포했다. 묵호는 낯설었다. 거기에서 오래 버틸 재간이 내겐 없었다. 묵호항엘 들렀다. 많은 선박들이 그곳에 정박해 있었고 금방 부려 놓은 듯 노가리 떼가 항구의 콘크리트 바닥에 무덤처럼 쌓여 있었다. 생선 비린내가 풍기고 질박한 생의 적나라한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나는 방파제로 나갔다. 바다는 죽어 있었다. 주문진이 선선했다면 묵호는 메마르고 거칠었다. 방파제에서 본 묵호 근해는 검푸르게 오염된 바다였다. 항구엔 선박에서 흘러나온 폐유가 떠다녔다. 하지만 바다가 죽어 있는 대신 묵호는 살아 있었다. 그러니까 묵호가 살아남기 위해 서서히 바다를 죽였던 것이다. 수평선을 바라보며 쭈그리고 앉았다. 묵호는 푸근한 고향이 아니었다. 잠시 들렀다가 이내 떠나는 주막이었다. 바다 멀리 수천 톤의 거대한 선박이 떠 있고 갈매기들이 물 위에 앉아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보였다. 묵호의 짠 바닷바람이 불어왔다.”(154~155쪽)
저자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서 활동하다 해직 교사로 지낸 경력이 있다. 이 이행기에는 저자의 역사관을 엿볼 수 있는 글도 있었다. “대진 항구를 뒤로하고 이승만 별장이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어제는 해가 저물어서 보지 못했으니 가는 길에라도 꼭 보고 싶었다. 이승만 별장은 화진포 안의 섬처럼 떠 있는 언덕배기에 자리 잡고 있었다. 화진교 다리를 건너지 않으면 닿을 수 없는 곳이었다. 화진교 다리를 건너면서 문득 생각했다. 육이오 전쟁이 터졌을 때 이승만은 한강 다리를 폭파하고 자기만 살겠다고 혼비백산 남쪽으로 도망치지 않았던가. 또다시 위험이 닥치면 재빨리 화진교를 폭파하고 도망치려고 별장을 다리 건너편에 지은 게 아닐까, 하는 객쩍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화진포 둘레에는 별장이 세 곳 있다. 이승만 별장과 김일성 별장 그리고 이승만 밑에서 부통령을 지낸 이기붕의 별장이 그것이다. 이승만 별장은 오래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를 않아 이내 화진교를 건너 김일성 별장으로 향했다. 김일성 별장은 ‘화진포의 성’이라고도 불린다. 1948년부터 1950년 전쟁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사용했다고 한다. 화진포 최고의 절경인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출렁이는 동해 바다를 볼 수 있고 동시에 고요한 화진포 호수도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부통령 이기붕은 어찌 그곳에 꼽사리를 끼었을까. 김일성 별장 아래쪽 평지에 이기붕 별장이 있는데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이기붕의 부인이 박마리아라는 사실이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국어책인지 도덕책인지 박마리아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박마리아를 미화한 이야기 같은데 자세한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박마리아란 이름이 독특해서 기억에 남아 있었을 뿐, 그 여자가 이승만의 꼬붕 이기붕의 부인인지는 까맣게 몰랐다. 이런, 젠장. 요즘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는 무리들이 결국 이런 인물들을 교과서에 싣겠다는 것 아닌가. 이기붕 별장을 본 뒷맛이 썩 개운치가 않았다.”(244~245쪽)
이 책은 형식과 내용 구성에서 여타의 많은 여행기와 차별을 두고 있다. 대부분의 여행기 혹은 여행 에세이는 여행지 관련 사진이 많은 지면을 차지하는데 이 책은 사진이 한 장도 없다. 책날개에 의례 실리는 저자 사진도 없다. 유승하 화가가 그린 만화 형식의 그림이 사진을 대신하고 있다. 그림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지루하지 않게 글을 읽을 수 있게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동행한 ‘아내’를 ‘나의 그녀’라고 부른다. 양성평등을 실천하는 의미에서 ‘나의 그녀’란 명칭을 사용하는지, 아직도 연애 감정을 가지고 살고 있어서 ‘나의 그녀’라고 부르는지 알 수 없다. 나는 ‘나의 그녀’보다 ‘아내’라고 불렀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그녀도 한껏 좋아했다’는 표현보다는 ‘아내도 한껏 좋아했다’는 표현이 더 간결하고 자연스럽지 않을까? 글을 읽으면서 ‘나의 그녀’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30년을 같이 산 노부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나도 저자가 걸어간 길을 따라 해파랑길을 걷고 싶었다. 아내와 같이 갈 수 있을까 생각해 봤지만 걷는 걸 싫어하는 아내는 절대 같이 가지 않을 것이다. 친구와 함께 가든지 아니면 혼자 가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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