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골집

kdy820 2022. 7. 4. 18:20

봄이 무르익은 날, 청송으로 나들이를 갔다. 송소고택으로 가는 길 주변에는 영산홍이 군데군데 피어 방문객을 반기고 있다. 고택 안내판 앞에 핀 꽃잔디가 예쁘다.

행랑채가 딸린 솟을대문을 지나면 큰사랑채와 작은사랑채, 안채, 별채로 이루어진 송소고택을 만날 수 있다. 조선시대 만석의 부를 누린 심처대의 7세손 송소 심호택이 청송 심씨의 고향인 덕천마을로 돌아오면서 지은 99칸의 대저택이다.

낮은 흙담을 지나 큰사랑채 툇마루에 앉아 사진을 찍고, 안채와 별채를 둘러보았다. 사랑채와 안채가 ㅁ자 모양이다. 안채 뒤쪽은 대나무숲이고 넓은 공터가 담까지 이어진다. 별채는 사랑채 옆, 따로 만든 대문을 통해 들어간다.

고택 마당 곳곳에 가꾸어진 정원에는 작은 석탑과 석등이 있고, 새끼를 업은 두꺼비가 포즈를 취하기도 한다. 정원 가장자리에는 꽃잔디가 분홍 띠를 두르고 있다. 정원 앞에는 수석들이 줄지어 있고, 곳곳에 소나무와 향나무가 자라고, 빨간 영산홍, 하얀 모란이 봄을 맞아 꽃을 피우고 있다. 우물이 있고, 장독대가 있고, 지붕보다 높은 굴뚝이 있다.

서민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9대 만석꾼의 기와집을 보면서 작은 꽃밭 하나 겨우 가진 시골집을 생각했다. 나는 대구에서 살면서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의 집을 시골집이라 불렀다. 초가집, 기와집, 양옥집이 차례대로 시골집이 되었다. 아버지가 일생 동안 지으신 집이다.

초가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안채, 사랑채, 헛간채로 이루어진 집이었다. 안채 뒷마당에 감나무가 두 그루, 사랑채 서편에도 감나무가 있었다. 봄에는 감꽃을 줍고, 여름에는 떨어진 감을 물이 든 단지에 넣어 삭혔다. 감나무에 올라갔다가 쐐기에 쏘이기도 했다. 작은 고모가 장독대 옆에 꽃밭을 가꾸었다. 채송화가 곱게 핀 꽃밭 앞에서 누나와 놀았던 기억이 난다. 다섯 살 많은 누나가 나를 돌봤을 것이다. 낮은 돌담 앞에 작은 도랑이 있어서 어머니가 빨래를 하기도 했다. 도랑 주위의 논둑에서 낫으로 소꼴을 베다가 손가락을 베기도 했다. 돌담 밖으로 나온 헛간 처마에 커다란 말벌집이 있었다. 동네 청년들이 벌집을 떼줬다. 떨어진 벌집에서 말벌들이 날아오를 때는 벌에 쏘일까 봐 멀리 달아났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대구로 가서 삼촌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는 과수원 가까운 논에 기와집을 짓는다고 하셨다. 대목수 다섯 분과 아버지, 어머니, 머슴 등이 1년간 일해서 기와집을 완성했다. 서까래와 기둥은 인근 산에서 나는 소나무로 조달했다. 어머니는 1년 내내 목수들의 밥과 새참을 장만했다.

마을에서 가장 큰 기와집이었다. 안채는 부엌과 안방, 대청, 건넌방을 갖춘 4칸, 사랑채는 사랑방과 우사, 창고로 3칸, 독립된 창고가 두 곳에 자리 잡았다. 초가집을 판 돈으로 기와집 담을 쌓았다. 마을에서 외따로 떨어진 곳에 자리잡아서 주위에는 온통 논과 과수원이었다. 크기만 할 뿐 생활하는데는 불편하였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외풍이 심했다. 설날에는 마당에 멍석을 깔고 차례를 지냈는데, 발이 시러워서 참기 힘들었다. 뒷마당이 꽃밭을 겸했다. 꽃보다 잡초가 더 많았다.

집을 지을 때부터 공부를 하기 싫었다. 몇 번 가출을 되풀이하다가 학교를 그만두었다. 머슴을 따라다니면서 농사를 짓고, 과수원에서 일하고, 밤에는 고향 친구들과 놀았다. 겨울에는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러 갔다. 일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편했다. 아버지는 안채 지붕이 사랑채 지붕보다 낮아서 장남이 잘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기와집에서 지낸 지 30년이 지났다. 하양-음양간 4차선 도로를 만드는데 집터와 과수원이 모두 들어간다고 하였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살던 집터에 다시 집을 지으셨다. 이번에는 양옥집이었다. 안방과 건넌방, 사랑방, 거실, 부엌, 욕탕 겸 화장실을 갖추었다. 3개월이 걸렸다.

아내와 함께 일주일에 한 번씩 시골집에 다녔다. 아버지는 처음 만든 대문이 좁아서 차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다면서 대문 자리를 넓혔다. 그 후에 대문 두 짝이 멀어져서 잠글 수가 없다. 항상 대문을 열어두고 지낸다.

담 밑에 화단을 만들고 화분을 놓았다. 산과 들에 핀 야생화를 옮겨 심고, 아파트 베란다에 키우던 꽃나무도 가져다 심었다. 꽃밭은 담 안쪽에 담을 따라 길다랗게 만들어져 있다. 햇빛을 받기 위해 모든 식물들이 키다리가 된다.

송소고택은 요즘 고택 체험 공간으로 제공된다.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의 숙박 요금이 다르다. 세월은 흘렀어도 그 당시 신분에 따른 차별이 그대로 남아 있는 듯하다. 하루 이틀쯤 머물면서 품위 있고 여유 있게 지낸 조선 후기 상류층의 생활을 온몸으로 느껴보고 싶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시골집을 물려받았다. 지하 창고에 페인트를 칠하고, 뒷 베란다에 타일을 새로 붙이고, 벽지와 장판을 새로 갈았다. 작은도서관으로 바꾸어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고향처럼 드나들었으면 한다. 마당 주위에 꽃밭을 더 많이 만들어야겠다.

송소고택은 그림 속의 집이다. 가족의 보금자리를 위해 아버지가 지으신 시골집 세 채에 어린 날의 추억이, 젊은 시절의 방황이, 부모님과 함께 지낸 세월이 담겨 있다. 부모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잊을 수 없는 마음속의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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