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해가 뜨기 전에 집을 나선다. 공항교 아래로 내려오면 금호강 산책길이다. 새벽부터 걷는 사람들이 많다. 걷기만 해도 병이 낫는다고 했던가. 나이든 사람에게 걷기는 빼놓을 수 없는 일과가 되었다.
몇 년 전에는 봉무공원 만보산책로를 걸었다. 단산지 입구에서 출발하여 감태봉과 구절송을 지나 나비체험관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7킬로미터 구간에 2시간 30분이 걸린다. 100만 보를 채우겠다고 결심했는데 69만 보에 그쳤다. 이제는 나이 탓을 하며 하루에 만 보를 걷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건강을 위해 걸으면서 생계를 위해 길을 걷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내가 어릴 적에 우리 집에 들리는 사람 중에 엿장수가 있었다. 엿을 싣고 온 리어카를 맡기고, 지게에 엿상자를 옮겨서 갓바위 아랫마을이나 능성고개 너머에 있는 마을까지 간다고 했다. 구불구불한 길을 걸어 산골 마을에 도착하면, 가위를 울려서 엿장수가 왔다는 것을 알리고, 돈이 되는 온갖 고물들을 받고 엿을 팔았다. 날이 어두워져 돌아올 때는 엿과 바꾼 고물들을 지고 왔다. 하양에서 엿을 구매하여 리어카에 싣고 이십 리를 걸어 우리 집에 맡기고 다시 삼십 리를 걸어 엿을 팔았으니, 집을 한 번 나오면 백리 길을 넘게 걸은 셈이다.
교통이 불편했던 그 시절에는 대다수 장사꾼들이 다 걸어다녔다. 장돌뱅이, 방물장수, 소장수, 독장수, 각종 물건을 수리하는 사람들까지. 길 위의 인생을 산 사람들이다.
오늘날에도 길 위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많다. EBS 다큐 영화 <길 위의 인생> ‘편지 왔습니다’. 부산광역시 사하구 감천동에 우편물을 배달하는 집배원 K 씨가 주인공이다. 2,300여 가구가 사는 산동네고 오토바이가 다닐 수 없는 골목길이 80퍼센트다. 워낙 복잡해서 웬만한 사람은 길을 잃기 일쑤라고 한다. K 씨만 길을 제대로 알기 때문에 수십 년 동안 혼자서 우편물을 배달하고 있다. K 씨도 길 위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다.
길은 일생 동안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 조상들은 사람의 한평생을 길에 빗대어 표현했다. 과거길을 걷고, 벼슬길에 오르고, 출세가도를 달리고, 황혼길에 접어들며, 마지막에는 저승길을 걷는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등 길에 관한 속담도 많다. 사람의 일생은 길 위의 인생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리라.
몇 년 전부터 주소체계를 지번에서 도로명으로 바꾸었다. 길의 크기에 따라 대로(大路), 로(路), 길을 붙이고 건물 번호를 부여했다. 지번보다는 길이 우리 생활에 더 가까워진 것 같다. 이러한 변화도 길 위의 인생을 시사하고 있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산책길은 잘 포장된 직선 길이다. 산굽이를 돌아가던 구부정한 곡선 길은 도로포장 기술의 발달과 함께 거의 다 직선으로 바뀌었다. 자동차를 이용하여 먼 길을 빠르게 갈 수 있지만, 곡선으로 이루어진 길을 걸을 때의 여유와 정감은 사라져 버렸다. 친구들과 걷던 옛길이 그립다.
인생길도 이와 같다. 도시의 좋은 집, 성공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 직선으로 뚫린 탄탄대로를 달리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시골집, 가난한 부모 아래에서 자라며 이리저리 굽은 곡선 길을 걷는 인생도 있다.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지나가고 부모의 지위가 자식의 스펙이 되는 시대가 되어 인생길이 더 힘들어졌다. 그래도 끝까지 걸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걷는 산책길에 개나리꽃, 벚꽃이 피었다가 지고, 갈퀴나물, 노랑꽃창포, 큰금계국, 기생초, 접시꽃, 코스모스꽃이 차례로 피고 진다. 우리가 걷는 인생길도 굽이마다 사연이고, 골마다 눈물이지만 그런 사연과 눈물로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철마다 피어나는 꽃을 보며 느꼈던 기쁨과 즐거움을 추억하며 살아야 한다.
금호강 저편에서 아침 해가 떠오른다. 길 위의 인생, 내가 아는 사람들의 인생길이 떠오르는 해처럼 밝아지기를, 곡선 길을 벗어나 직선 길을 달리기를 기원하며 나는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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