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을 처음 가진 것은 23년 전이었다. 엔조이스쿨에서 실시하는 이벤트에 당선되어 ‘김대영/대구○○초등학교’라는 명함을 받았다. 학생을 가르치는 직업이라 명함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던 때였고, 명함을 사용할 기회도 오지 않았다. 교사 중에서도 명함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명함 뒷면에 문학 및 음악 단체의 감투를 여럿 나열하고 있어서 자기 과시욕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초등교육 전문직으로 근무할 때는 조직 개편이 빈번하였다. 부서가 바뀔 때마다 명함을 받았다. 기관명, 직책, 주소, 전화로 되어 있는 명함 앞면에 교육정책을 알리는 문구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직책과 이름만 다른 획일화된 명함이 난무하였다.
N초등학교 교장으로 발령받았을 때, 직책과 이름을 ‘교장/○○박사 김대영’이라고 인쇄했다. N초등은 내가 다녔던 학교다. 모교 출신 교장이 부임했다고 총동창회, 기수별 동창회 등에서 인사차 들리기도 하고, 행사를 알리러 오기도 했다. 명함을 주고 받을 때, 나를 보고 “○○박사시네요.”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학위가 있다는 것을 은근히 자랑하고 싶었는데 명함이 대신해줬다.
행정실장이 교육청에서 원하는 명함 양식대로 해야 한다면서 다시 만들어왔다. 명함 뒷면에 글씨가 가득했다. ‘금품·향응·편의 요구나 권한남용, 특혜, 알선, 청탁 등 교육 현장 부패행위 신고’, “IP추적불가능, 익명보장”, ‘스마트폰 활용 신고’, ‘QR코드를 찍으면 익명신고창이 열립니다.’라는 글과 ‘대구광역시교육청이 함께하는 청렴韓 세상’이라고 끝맺고 있었다. U초등학교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뒷면은 똑 같았다. 이런 명함은 학교 관리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생각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년퇴직 후에는 명함이 없어졌다. 백수 생활 1년 6개월 후에 기사 작성 시험을 거쳐 기자가 되었다. ‘시니어○○ 기자/김대영’이라는 명함을 받았다. 친구들은 명함이 있는 나를 부러워했다. 온라인 신문이라 명함 쓸 일이 그다지 없었는데, 1년에 한 번씩 명함을 신청하는 기자가 있어서 그 많은 명함을 어디에 사용하는지 궁금했다.
2020년 11월 1일에 ‘장서산책작은도서관’을 개관했다. 직책이 관장이라 명함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도서관 주소, 전화번호 등 필요한 정보를 넣어서 명함 제작을 주문했다. 인쇄소에서 받은 명함을 보고 깜짝 놀랐다. ‘경북 경산시 와촌면 새터길 63, 2층’이 도서관 주소인데, ‘신한길 63, 2층’으로 되어 있었다. 새터길로 바꾸어 다시 인쇄했다.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성격 탓에 잘못 만든 명함은 서랍 속에 보관했다.
1년 후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본가에 아무도 살지 않게 되었다. 임대료 부담을 줄이기 위해 도서관을 본가로 옮기기로 했다. 부모님이 남기신 유품을 모두 정리하고, 집을 새로 단장했다. 이사를 하고 도서관 등록증도 갱신했다. 명함은 그다지 쓰이지 않아서 만들지 않기로 했다.
어느 날 책상 정리를 하다가 잘못 인쇄된 명함을 봤다. 본가로 옮긴 도서관 주소는 ‘신한리 3’이었다. 수정펜을 구입해서 ‘신한리 63, 2층’으로 되어 있는 명함에서 ‘6’과 쉼표, ‘2층’을 지웠다. 글자 간격은 고르지 않았지만 ‘신한리 3’이 남아서 도서관 주소가 되었다. 생각지도 않던 명함을 가지게 되었다.
명함은 일정한 기간 동안 나를 대신하지만 그 기간이 지나면 소용없어진다. 쓰고 남은 명함 케이스를 한 곳에 모았더니 20개가 넘었다. 케이스 하나에 70~80장의 명함이 들어 있어서 대충 계산해도 1천 500장이다. 그냥 잘라서 버리면 종이 낭비일 것이다.
명함은 여러 가지로 활용할 수 있지만, 가장 흔한 방법은 메모지로 쓰는 것이다. 명함 뒷면을 비워두는 것도 메모하기 위해서다. 나이 탓인지 아내도 나도 무엇인가를 자주 잊어버린다. 이럴 때 식탁이나 책상, 전화기가 있는 탁자 등 여러 곳에 명함을 놓아두면 시장갈 때나 전화받을 때, 새로 나온 낱말을 기억해야 할 때 등 여러 상황에서 메모할 수 있다.
뒷면에 글자가 인쇄되어 있는 명함은 반으로 잘라서 책갈피로 쓰고 있다. 나는 책을 읽을 때 중요한 내용이 있는 페이지는 책갈피로 표시하는데, 한 권을 다 읽을 때까지는 여러 장이 필요하다. 명함을 책갈피로 사용하면 필요한 곳에 얼마든지 쓸 수 있다.
그 외에도 명함은 화투, 트럼프, 단어장, 숫자 카드, 서류함 라벨, 일회용 명찰, 가구 받침, 식탁 수저받침, 휴대용 구두주걱, 이쑤시개 등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하는데 직접 시도해 보지는 않았다. 명함처럼 작고 흔한 물건이라도 재활용하는 방법을 찾아보면 내게 부족한 창의력이 조금씩 자라날 것이다.(2023.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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