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나는 아직도 공이 두렵다

kdy820 2023. 5. 26. 23:45

  골프가 대중 스포츠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되었다. 주말이 되면 골프채를 트렁크에 싣고 주차장을 떠나는 부부를 많이 본다. 필드에 나가지 않는 날은 골프 연습장에서 만나자고 약속한다. 노년에 파크골프를 치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서 골프채 생산업체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그 가격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재직할 때 골프에 대한 유혹을 많이 받았다. 관리자니까 당연히 골프를 칠 것이라 생각하고 필드에 같이 가자고 제안하는 부장이나 교사들이 많았다. 내가 골프를 치지 않는다고 하면 모두 놀라는 눈치다. 골프를 모르는 나를 조금은 불쌍하게 보면서 지금 배워도 늦지 않다고, 골프 연습장에 같이 가자는 선생님도 있었다.

  퇴직하기 전에 파크골프 연수를 받는 친구들이 많았다. 퇴직 후 모임에서도 골프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꿀먹은 벙어리가 된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1978년에 경주시(당시는 월성군) A초등학교에 초임 발령을 받았다. 한 달에 한 번 학교에서 친목회를 하고, 일 년에 한 번 황성공원에서 교직원 체육대회를 하던 때였다. 학교 친목회는 무조건 배구대회였다. 10월에 열리는 교직원 체육대회를 대비하여 3월부터 연습을 했다.

  처음 친목회에 나갔을 때는 내 허우대만 보고 “우리 학교 배구팀이 크게 보강되겠네.”라면서 잔뜩 기대를 하는 것 같았다. “배구 잘 못합니다.”라고 손사래를 쳤지만 총각 선생이 겸손하기까지 하다고 했다. 내가 배구장 맨 앞에 서서 스파이크로 공격하고, 블로킹해주기를 바랐다. 배구 정말 못한다고 거듭 말하고, 9인제 배구 경기장 맨 뒷줄에 섰다.

  배구가 시작되면 내 실력을 알게 된다. 키만 컸지 운동은 젬병이다. 어쩌다 공이 오면 눈이 저절로 감겨지고 목이 움츠러든다. 나도 모르게 배구공을 피한다. 내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오는 공은 받지 않는다. 어쩌다 공에 손을 대면 라인 밖으로 나가버린다. 배구장은 너무 넓고 배구공은 너무 무서웠다. 공에 손을 대기는 하늘의 별따기였다.

  처음에는 서브도 제대로 넣지 못했다. 오른쪽 팔목으로 공을 치니 공이 제대로 날아가지 않았다. 서브 차례만 되면 상대편에 1점을 그냥 주는 경우가 많았다. 배구장에 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선배 교사들은 “서브라도 제대로 넣어라.”거나, “공이 날아오면 다른 사람이 받을 수 있게 자리를 피해라.”고 했다.

  배구는 대개 3세트, 혹은 5세트까지 하게 된다. 한 세트가 끝날 동안 공 한 번 만져보지 못하고 배구장에 서 있어 본 사람은 그 시간이 얼마나 긴지 안다. 배구장 안에서 배구선수들의 경기를 구경하는 꼴이다. 별 생각 없이 서 있다가 갑자기 공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아득하다. 막상막하의 경기일 경우 1점을 그냥 상대방에게 헌납하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본다.

  경기에 이기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지고 나면 모두 내 탓인 것 같다. 경기 후 가지는 뒤풀이 자리도 즐겁지 않았다. 처음에는 ‘원래 배구 못하는데 어쩌란 말이냐, 자꾸 하다 보면 실력이 늘겠지.’라고 생각했지만, 10년이 지나도 배구 실력은 제자리걸음이었다.

  학교 간 친목배구를 하는 날은 더 미안했다. Y초등학교는 벽지학교라 1학년에서 6학년까지 모두 남자였다. 6인제 배구라도 무조건 배구장에 서야 한다. 나만 배구를 못하지 다른 선생님들은 다 잘한다. 내가 못해서 동료 교사들이 피해를 본다고 생각했다. 배구장에 들어서면 생각나는 것은 하나뿐이다. ‘언제쯤 이 배구장을 떠날 수 있을까.’

16년 후에 구미시 S초등학교로 이동하게 되었다. 40학급이 넘었다. 경주시에 근무할 때는 학교에서 막내였는데, 구미시에서는 후배가 수두룩했다. 배구를 잘하는 후배가 “선배님은 응원단장을 하시면 됩니다.”라고 했다. 하늘을 날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교육전문직이 되고부터는 배구를 할 기회가 없어졌다. 관리자가 되어 학교에 나왔을 때는 더 이상 배구에 신경쓰지 않아도 됐다. 드디어 배구 공포증에서 벗어났다.

  배구만이 아니다. 축구는 헛발질하기 일쑤고, 야구는 배트로 공을 맞힌 적 없었다. 족구는 4명 안에 들지도 못한다. 교대 1학년 때부터 당구장에 다녔는데 아직도 초보 수준이다. 탁구, 배드민턴, 테니스 등 공으로 하는 운동은 제대로 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누가 구기 운동에 대해 물으면 “가장 작은 탁구공부터 가장 큰 농구공까지 공으로 하는 운동은 다 못한다.”고 말한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유일한 공 운동은 ‘피구’였다. 공을 잘 피해야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제법 잘 피했다. 피구를 잘 해서 그 후에도 내게 오는 모든 공을 다 피하게 되었을까. 그럴 가능성이 많다.

  중학교 때 체육 선생님은 시간마다 축구공, 농구공, 배구공 등을 던져 주면서 ‘아나공’ 운동을 시켰다.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었다. 가장 많은 축구 시간에 골키퍼와 놀면서 시간을 보냈다. 고등학교는 다니지 못했다. 검정고시를 거쳐 교대에 진학했다. 체육 시간에 구기 운동을 배웠는데 겨우 학점을 따는 수준이었다.

  초등학교 운동회 때 달리기를 하면 거의 꼴찌였다. 체육 시간이 싫었다. 피구를 제외하면 평생 동안 공과 친해질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고, 잘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공이 두렵다.(2023.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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