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37

길 위의 인생(2)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집을 나선다. 공항교 아래로 내려오면 금호강 산책길이다. 새벽부터 걷는 사람들이 많다. 걷기만 해도 병이 낫는다고 했던가. 나이든 사람에게 걷기는 빼놓을 수 없는 일과가 되었다. 몇 년 전에는 봉무공원 만보산책로를 걸었다. 단산지 입구에서 출발하여 감태봉과 구절송을 지나 나비체험관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7킬로미터 구간에 2시간 30분이 걸린다. 100만 보를 채우겠다고 결심했는데 69만 보에 그쳤다. 이제는 나이 탓을 하며 하루에 만 보를 걷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건강을 위해 걸으면서 생계를 위해 길을 걷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내가 어릴 적에 우리 집에 들리는 사람 중에 엿장수가 있었다. 엿을 싣고 온 리어카를 맡기고, 지게에 엿상자를 옮겨서 갓바위 아랫마을이나 능성고개 너머..

수필 2022.07.10

시골집

봄이 무르익은 날, 청송으로 나들이를 갔다. 송소고택으로 가는 길 주변에는 영산홍이 군데군데 피어 방문객을 반기고 있다. 고택 안내판 앞에 핀 꽃잔디가 예쁘다. 행랑채가 딸린 솟을대문을 지나면 큰사랑채와 작은사랑채, 안채, 별채로 이루어진 송소고택을 만날 수 있다. 조선시대 만석의 부를 누린 심처대의 7세손 송소 심호택이 청송 심씨의 고향인 덕천마을로 돌아오면서 지은 99칸의 대저택이다. 낮은 흙담을 지나 큰사랑채 툇마루에 앉아 사진을 찍고, 안채와 별채를 둘러보았다. 사랑채와 안채가 ㅁ자 모양이다. 안채 뒤쪽은 대나무숲이고 넓은 공터가 담까지 이어진다. 별채는 사랑채 옆, 따로 만든 대문을 통해 들어간다. 고택 마당 곳곳에 가꾸어진 정원에는 작은 석탑과 석등이 있고, 새끼를 업은 두꺼비가 포즈를 취하기..

수필 2022.07.04

발명에 대한 단상

기간제 교사를 하는 동안 학생과학발명품을 출품해야 하는 일이 일어났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과학에 대한 관심과 소양이 부족한 데도 끝까지 벗어날 수 없는 관련 업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학부장은 4월에 과학의 달 행사를 해야 한다. 학생과학발명품경진대회와 과학전람회가 중심 행사인데, 학교마다 의무적으로 1편 이상 교육지원청에 제출해야 한다. 학생과학발명품은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학생 중 발명에 관심 있는 학생이 만든 발명품을 교내대회를 거쳐 기한 내에 출품해야 한다. 학생들의 발명품이야 뻔한 것들이다. 우산 끝에 바퀴를 달아 끌고 다닌다거나, 책가방이 스스로 따라오게 한다는 것 등이다. 쓸만한 발명품은 발명에 관심이 많은 학부모나, 담임교사가 학생을 대신해서 만들어 학생 이름으로 출품한다...

수필 2022.06.19

책을 보관하는 가장 좋은 방법

장서가에게 가장 골치 아픈 일은 책의 보관일 것이다. 특히 책의 무게 때문에 집이 곧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노심초사하고 있는 아내의 눈을 피해서 책을 모으고 보관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직장이 있는 경우라면, 구입한 책의 배송장소를 집과 직장 사무실로 나누어야 한다. 벽돌책이나 대형 고가본은 직장으로 배송되도록 하고, 작고 가벼운 책은 집으로 오게 한다. 직장으로 배송된 책은 차 트렁크에 보관했다가 아내가 잠든 새벽이나 한밤중에 집 안으로 옮긴다. 책을 구입하다 보면 같은 제목의 책을 두 번 혹은 세 번 정도 구입하는 일이 있는데, 이때는 한 권만 전시하고 나머지 책은 아내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겨야 한다. 책장에 책을 전시할 때는 5단으로 된 책장의 각 단을 먼저 채우고 책장 위쪽에 책을 전시한다. 그..

수필 2022.06.19

단풍나무를 옮긴 벌

오른팔이 이유 없이 아프기 시작하더니 마침내는 팔을 올리기도 힘들게 되었다. 술잔을 들 힘이 없어서 왼손으로 들었다. 평소에 쓰지 않던 왼손을 쓰려니 불편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세수를 할 때도, 머리를 감을 때도 왼손을 주로 사용하고 오른손은 보조하는 역할만 한다. 오른손잡이인 내가 왼손잡이가 된 기분이다. 오늘 아침에 집을 나올 때도 가방과 도시락을 왼손으로 들었다. 가방을 어깨에 메면 오른쪽 어깨가 아파서 인상이 찌푸려진다. 운전할 때도 왼손으로 하고 오른손은 늘어뜨린 채 가만히 두었다. 오른손을 쓰지 않으면 아픔을 덜 느낀다. 멀쩡하던 오른팔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처음부터 심하게 아프지는 않았다. 팔이 저리는 현상이 1주일 정도 지속되었다. 이러다 낫겠지 생각하면서 오른팔을 계속 사용했다..

수필 2022.05.22

식자우환(識字憂患)

회원 6명이 한 달에 한 번씩 만나서 친목을 도모하는 모임이 있다. 5월 모임에서 칠곡에 거주하는 회원은 치매검사를 받으러 가야겠다고 했다, 도시철도 3호선을 타면서 무임 승차용 카드가 아닌 후불제 카드로 결재했다는 것이다. 두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또 다른 회원이 있었다. 회장이 전화해서 물어보니 오늘이 모임 일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그냥 집에 있다고 한다. 늦게라도 얼굴 보러 온다는 것을 오지 말라고 했다. 식당 상호가 ‘곡주사 조은맛집’이었다. 우리는 ‘곡주사’라고 줄여서 부른다. 막걸리와 소주를 마시면서 ‘곡주사’가 무슨 뜻인지 의견을 나누었다. 절에서는 술을 곡주(穀酒)라고 부르기도 하니, ‘곡주’가 술을 의미한다는 데는 의견이 일치했다. 나와 마주 앉은 회원이 ‘사’자는 ‘절 사(寺)’자..

수필 2022.05.22

제2의 인생에서 행복 찾기

넷플릭스에서 영화 ‘인턴’을 봤다. 전화번호부 회사에서 40년을 근무한 벤(로버트 드 니로)은 퇴직 후 공허한 마음을 견딜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고령 인턴 채용’에 지원하여 30세에 CEO가 된 줄스(앤 헤서웨이)의 회사에 취업한다. 70세의 벤은 젊은 직원의 어려움을 해결해주고, 마사지사인 피오나(르네 루소)와 새로 사귀고, 줄스의 가정일을 돕고 회사 업무에 조언하는 역할을 하며 제2의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간다. 제2의 인생은 평생 다니던 직장에서 퇴직하고 나면 곧바로 시작된다. 50대 후반이나 60대 초반이다. 평균수명이 늘어난 탓에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 할 기간도 자연히 늘어났다. 인생 후반기를 성공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퇴직 전에 새로운 인생을 미리 설계하라고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가...

수필 2022.05.15

약속과 변명

올해 3월에 시니어매일 부장이 되었다. 17명의 부원이 올린 기사를 승인하고, 한 달에 한 번씩 시니어매일 본부에서 개최되는 부장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주된 업무이다. 지난달 부장회의가 끝나고 신문사 맞은편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식사 자리에 참가한 사람은 단장과 본부 부장, 취재 6부 부장 중 3명이 참석하여 모두 5명이었다. 식사 전에 술을 마시는 것이 관례이고, 주류와 비주류로 나누다 보니 단장과 같은 자리에 앉게 되었다. 맥주와 소주를 섞어 쏘맥을 만들고, 안주는 참가자미회였다. 계산성당 주차장에 승용차를 주차해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오랜만에 만난 술을 거절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차를 운전하여 집에 갈 요량으로 조금씩 마시다가, 이왕 먹는데 마음껏 마시고 대리운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수필 2022.05.15

길 위의 인생

4월 밝은 햇살을 받으며 전세버스를 타고 문학여행을 떠났다. 코로나19로 집안에서만 지내다가 3년 만에 오른 여행길이다. 처음 보는 선배들이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은 같은 길을 걷는 문우이기 때문이리라. 책 읽고 글쓰는 것도 수행이라면 우리는 모두 같은 도를 닦는 도반들이다. 대구를 벗어나자 멀고 가까운 산과 길가의 나무들이 연두색과 녹색으로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아카시아꽃이 흐드러지게 핀 신동재를 지나고, 산과 강과 논밭과 산기슭의 집들이 봄볕 아래 어우러진 길을 달려서 청송군 진보면에 도착하였다. 진보, 내 운명을 바꾼 결코 잊을 수 없는 곳이다.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개학일에 학교에 가지 않았다. 그날 오후에 북부정류장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안동에서 내렸다. 아무런 생각 없이 ..

수필 2022.05.03

천성암

어제 도서관에서 퇴근할 때 외장하드를 두고 왔다. 내가 작업한 모든 자료를 저장하는 매체여서 잠시라도 없으면 안 된다. 아침을 먹고 20년 된 칼로스를 운전하여 도서관에 갔다. 외장하드를 가지고 나오면서 천성암(天成庵)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늘이 만든 절’ 천성암은 통일신라시대에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가 창건했다. 갓바위 가는 길에 있는 버스정류장 부근에 차를 세웠다. 갈색 바탕에 흰색 고딕체로 쓴 ‘천년성지 전통사찰 천성암’ 안내판이 높다랗게 서 있다. 천성암 가는 길 입구에 있는 ‘경산시 산불감시초소’ 직원에게 목적지를 밝혔다. ‘걸어서 가면 30분 정도 걸릴 겁니다’라는 대답을 들었다. 초소 옆에는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천성암에서 내건 현수막 2장이 매달려 있다. 한 장은 ‘봉..

수필 2022.05.01